영화감독 집밥은 신비롭다. ‘집’과 ‘밥’이란 합성어에 내재해 있을 어원학적 의도도 신비롭지만, 일단 합성되고 난 ‘집밥’이란 단일명사가 주는 이유 없는 포스가 신비롭다. 이 신비는 단지 지성적인 범주에 남지 않고, 어김없이 경험으로 이어지기에 더욱 놀랍다. 그도 그럴 것이 맛없는 요리는 있어도 맛없는 집밥은 없다. 물론 요리를 못하는 엄마가 있을 수 있으나, 그녀의 요리가 맛없을지언정 그녀의 집밥은 맛없을 수가 없다. 나아가 우린 집밥이 맛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집밥이 맛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단출함과 장황함의 정도 차가 있을 뿐, 결코 맛이 없거나 반대로 맛이 있지도 않은 게 바로 집밥이다. 집밥은 맛과는 다른 차원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밥’ 앞에 붙은 ‘집’을 의심해봐야 한다. ‘집’이란 요소는 밥을 맛의 범주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범주로 옮겨오니 말이다. 집밥이 맛없기 위해서는, 엄마가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그 밥을 엄청 맛없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밥 자체는 맛없을 수 없다는 시뮬레이션을 통한다면, 의심은 더욱 거세어진다. ‘집’은 밥의 공간적인, 그래서 객관적인 위치가 아니다. ‘집’은 밥이 주어지는 그 총체적인 상황이며, 밥 먹는 이가 밥을 대하는 태도다. 나아가 그것은 밥상 앞과 뒤에 앉은 이들을 연결하는, 고갈되지 않는 그물망 같은 것이다. 집밥의 반대말이 굳이 찾는다면 ‘매식’(買食)이 될 것이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매식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밥을 산 비용(買)과 내 혀가 얻은 수익(食) 간의 편차, 즉 맛의 이윤이다. 매식의 이윤율은 한 메뉴를 고정할수록 점점 하락한다는 점에서, 심지어 자본주의를 닮은 것도 같다. 자본주의가 주어진 시장의 외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것처럼, 매식은 주어진 메뉴의 외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충동에 시달리며, 이 충동을 돌파하지 않으려는 자, 맛의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다가 공황을 맞이한다. 즉 한 식당의 메뉴를 섭렵하고서 끝내 물려서 식당을 갈아탄다. 반면 집밥엔 이윤율도, 인플레이션도, 고로 공황도 없다. 집밥엔 평가할 맛도 없고, 고로 물릴 맛도 없다. 대신 집밥에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밥(‘메뉴’)이 아니라, 밥이 주어지는 상황,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주체들의 관계들(‘집’)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포근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밥상의 앞뒤뿐만 아니라 정확히 밥상 안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매식의 경우 하나의 중심 메뉴에 밑반찬들이 주변화된다. 이것은 광고에 있어서 스타와 배경의 간극 같은 것으로서, 밥상의 중앙집권제를 구성하는 윗반찬과 밑반찬의 위계적 거리다. 평가되는 것은 그 배열이며, 이를 조직한 주방장이다. 반면 집밥의 경우 메인 메뉴도, 고로 밑반찬도 따로 없다. 집밥의 모든 세부 메뉴가 밑반찬이다. 평가되는 것은 오히려 밥상의 밑바탕, 즉 집 자체, 밥을 주는 사람과 밥을 먹는 사람의 관계 자체다. 이건 평가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느낌이다. 밥 한 공기 뚝딱 비워내는 것만으로도 평점은 언제나 10점 만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본주의의 유일한 외부로 남아 있는 공간이 집밥인지도 모르겠다. 메뉴끼리 경쟁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으며, 반찬통 뚜껑만 열린 채로 나와도 밑반찬들은 즉각적으로 맛의 평의회를 구성하니 말이다. 엄마의 멸치볶음은 30년째 인플레이션을 모른다.
칼럼 |
[김곡의 똑똑똑] 집밥 |
영화감독 집밥은 신비롭다. ‘집’과 ‘밥’이란 합성어에 내재해 있을 어원학적 의도도 신비롭지만, 일단 합성되고 난 ‘집밥’이란 단일명사가 주는 이유 없는 포스가 신비롭다. 이 신비는 단지 지성적인 범주에 남지 않고, 어김없이 경험으로 이어지기에 더욱 놀랍다. 그도 그럴 것이 맛없는 요리는 있어도 맛없는 집밥은 없다. 물론 요리를 못하는 엄마가 있을 수 있으나, 그녀의 요리가 맛없을지언정 그녀의 집밥은 맛없을 수가 없다. 나아가 우린 집밥이 맛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집밥이 맛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단출함과 장황함의 정도 차가 있을 뿐, 결코 맛이 없거나 반대로 맛이 있지도 않은 게 바로 집밥이다. 집밥은 맛과는 다른 차원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밥’ 앞에 붙은 ‘집’을 의심해봐야 한다. ‘집’이란 요소는 밥을 맛의 범주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범주로 옮겨오니 말이다. 집밥이 맛없기 위해서는, 엄마가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그 밥을 엄청 맛없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밥 자체는 맛없을 수 없다는 시뮬레이션을 통한다면, 의심은 더욱 거세어진다. ‘집’은 밥의 공간적인, 그래서 객관적인 위치가 아니다. ‘집’은 밥이 주어지는 그 총체적인 상황이며, 밥 먹는 이가 밥을 대하는 태도다. 나아가 그것은 밥상 앞과 뒤에 앉은 이들을 연결하는, 고갈되지 않는 그물망 같은 것이다. 집밥의 반대말이 굳이 찾는다면 ‘매식’(買食)이 될 것이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매식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밥을 산 비용(買)과 내 혀가 얻은 수익(食) 간의 편차, 즉 맛의 이윤이다. 매식의 이윤율은 한 메뉴를 고정할수록 점점 하락한다는 점에서, 심지어 자본주의를 닮은 것도 같다. 자본주의가 주어진 시장의 외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것처럼, 매식은 주어진 메뉴의 외부를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충동에 시달리며, 이 충동을 돌파하지 않으려는 자, 맛의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다가 공황을 맞이한다. 즉 한 식당의 메뉴를 섭렵하고서 끝내 물려서 식당을 갈아탄다. 반면 집밥엔 이윤율도, 인플레이션도, 고로 공황도 없다. 집밥엔 평가할 맛도 없고, 고로 물릴 맛도 없다. 대신 집밥에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밥(‘메뉴’)이 아니라, 밥이 주어지는 상황,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주체들의 관계들(‘집’)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포근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밥상의 앞뒤뿐만 아니라 정확히 밥상 안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매식의 경우 하나의 중심 메뉴에 밑반찬들이 주변화된다. 이것은 광고에 있어서 스타와 배경의 간극 같은 것으로서, 밥상의 중앙집권제를 구성하는 윗반찬과 밑반찬의 위계적 거리다. 평가되는 것은 그 배열이며, 이를 조직한 주방장이다. 반면 집밥의 경우 메인 메뉴도, 고로 밑반찬도 따로 없다. 집밥의 모든 세부 메뉴가 밑반찬이다. 평가되는 것은 오히려 밥상의 밑바탕, 즉 집 자체, 밥을 주는 사람과 밥을 먹는 사람의 관계 자체다. 이건 평가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느낌이다. 밥 한 공기 뚝딱 비워내는 것만으로도 평점은 언제나 10점 만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본주의의 유일한 외부로 남아 있는 공간이 집밥인지도 모르겠다. 메뉴끼리 경쟁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으며, 반찬통 뚜껑만 열린 채로 나와도 밑반찬들은 즉각적으로 맛의 평의회를 구성하니 말이다. 엄마의 멸치볶음은 30년째 인플레이션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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