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말에도 모양이 있다. 고로 말에도 촉감 같은 것이 존재한다. 돌아보라. 날카로운 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둥글둥글한 말이 있다. 장단도 있다. 날카로운 말은 분석적이고 차가워 엄밀할 순 있어도 그다지 친해지고 싶진 않다. 반면에 둥글둥글한 말은 여유가 있어서 좋지만 어디로 튀어도 되는 공처럼 쓸모없어질 때도 있다. 꽉 막힌 사각형 같은 말도 있다. 구슬처럼 연결되고 있던 문맥을 대뜸 잘라먹으며 자기 고집만 피우는 놈이다. 그래도 이놈은 삼각형 같은 말보다는 나을는지도. 삼각형은 둥글둥글한 놈과 직선으로 뻗은 놈 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갈까 머뭇거리며 눈치보고 있는 얄미운 녀석이다. 가장 밉상은 가시처럼 돋은 말이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꼭 그렇게 찌르면서 와야 하는 걸까? 물론 둥글둥글함이 과도해서 모든 믿음들을 독차지해놓고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지는 애드벌룬 모양의 허풍선이 말보다 더 충실할 순 있겠지만. 말의 모양이 있다는 것, 그것은 말이 우리에게 어떤 객관적 정보를 날라다주는 투명한 데이터 주머니만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반대로 말은 그가 나르는 정보를 주조할 수 있는 주형틀, 즉 쓰는 사람에 따라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매우 유연하게 변하는 주형틀임을 의미한다. ‘착하다’와 ‘순진하다’는 같은 사태를 지칭할 순 있어도, 엄청난 모양의 차이다. ‘수수하다’와 ‘빈약하다’, ‘검다’와 ‘까무잡잡하다’, ‘발랄하다’와 ‘방정맞다’, ‘냉정하다’와 ‘잔인하다’…. 이 목록은 천년만년 계속될 수 있다. 그래서 말의 모양의 궁극적 모양, 그 모양들 중의 모양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프레임일 것이다. 사태를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서 의미를 달리할 수 있는 게 바로 말의 모양이니까. 카메라 프레임만이 아니다. 말들은 그 모양들을 짓고 쌓는 편집기이기도 한다. 같은 사태가 악마의 편집을 거치느냐, 천사의 편집을 거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건 이 때문이다. 말의 모양은, 말을 쓰는 우리 모두가 이미 영화감독임을, 의미를 연주하는 마에스트로임을 의미한다. 말의 모양은 언어학에서도 골칫거리 화두였다고 한다. 특히 이슈는,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문제다. 말의 모양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생각’이란 그렇게 편집된 결과물일까? 아니면 그 편집 과정 자체일까? 말의 모양을 더 믿는 학자들은 후자의 편을 들었다. 왜냐하면 말의 모양은 몸짓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어서 말이 그를 대리하는 게 아니라, 말이 생각을 만든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마치 피아노 연주 같은 것이다. 피아노 연주자는 ‘악보를 연주로 옮겨야지’라는 맘으로 손가락을 움직이진 않는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그의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이며 그게 바로 곧 연주가 된다. 말은 그 자체로 이미 행동인 것이다. 이제 보니 우리 선조들이 언어학자들보다 더 똑똑하셨던 것도 같다. “말에 가시가 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은 할 탓이다”라는 속담은 이미 말을 하나의 행동하는 신체, 즉 무게와 모양을 지니고 행동하는 신체로 가정하고 있으니. 백남기 농민의 사인에 붙은 말은 ‘병사’였다. 일단 이 말의 모양은 슬픔이다. 무엇보다도 이 말의 모양이 당신의 어떤 순간, 나아가 삶까지도 편집해버린 데에 대한 슬픔이다. 말의 모양새는 행동이라고 했다. 행동엔 책임이 따른다.
칼럼 |
[김곡의 똑똑똑] 말의 모양 |
영화감독 말에도 모양이 있다. 고로 말에도 촉감 같은 것이 존재한다. 돌아보라. 날카로운 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둥글둥글한 말이 있다. 장단도 있다. 날카로운 말은 분석적이고 차가워 엄밀할 순 있어도 그다지 친해지고 싶진 않다. 반면에 둥글둥글한 말은 여유가 있어서 좋지만 어디로 튀어도 되는 공처럼 쓸모없어질 때도 있다. 꽉 막힌 사각형 같은 말도 있다. 구슬처럼 연결되고 있던 문맥을 대뜸 잘라먹으며 자기 고집만 피우는 놈이다. 그래도 이놈은 삼각형 같은 말보다는 나을는지도. 삼각형은 둥글둥글한 놈과 직선으로 뻗은 놈 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갈까 머뭇거리며 눈치보고 있는 얄미운 녀석이다. 가장 밉상은 가시처럼 돋은 말이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꼭 그렇게 찌르면서 와야 하는 걸까? 물론 둥글둥글함이 과도해서 모든 믿음들을 독차지해놓고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지는 애드벌룬 모양의 허풍선이 말보다 더 충실할 순 있겠지만. 말의 모양이 있다는 것, 그것은 말이 우리에게 어떤 객관적 정보를 날라다주는 투명한 데이터 주머니만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반대로 말은 그가 나르는 정보를 주조할 수 있는 주형틀, 즉 쓰는 사람에 따라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매우 유연하게 변하는 주형틀임을 의미한다. ‘착하다’와 ‘순진하다’는 같은 사태를 지칭할 순 있어도, 엄청난 모양의 차이다. ‘수수하다’와 ‘빈약하다’, ‘검다’와 ‘까무잡잡하다’, ‘발랄하다’와 ‘방정맞다’, ‘냉정하다’와 ‘잔인하다’…. 이 목록은 천년만년 계속될 수 있다. 그래서 말의 모양의 궁극적 모양, 그 모양들 중의 모양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프레임일 것이다. 사태를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서 의미를 달리할 수 있는 게 바로 말의 모양이니까. 카메라 프레임만이 아니다. 말들은 그 모양들을 짓고 쌓는 편집기이기도 한다. 같은 사태가 악마의 편집을 거치느냐, 천사의 편집을 거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건 이 때문이다. 말의 모양은, 말을 쓰는 우리 모두가 이미 영화감독임을, 의미를 연주하는 마에스트로임을 의미한다. 말의 모양은 언어학에서도 골칫거리 화두였다고 한다. 특히 이슈는,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문제다. 말의 모양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생각’이란 그렇게 편집된 결과물일까? 아니면 그 편집 과정 자체일까? 말의 모양을 더 믿는 학자들은 후자의 편을 들었다. 왜냐하면 말의 모양은 몸짓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어서 말이 그를 대리하는 게 아니라, 말이 생각을 만든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마치 피아노 연주 같은 것이다. 피아노 연주자는 ‘악보를 연주로 옮겨야지’라는 맘으로 손가락을 움직이진 않는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그의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이며 그게 바로 곧 연주가 된다. 말은 그 자체로 이미 행동인 것이다. 이제 보니 우리 선조들이 언어학자들보다 더 똑똑하셨던 것도 같다. “말에 가시가 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은 할 탓이다”라는 속담은 이미 말을 하나의 행동하는 신체, 즉 무게와 모양을 지니고 행동하는 신체로 가정하고 있으니. 백남기 농민의 사인에 붙은 말은 ‘병사’였다. 일단 이 말의 모양은 슬픔이다. 무엇보다도 이 말의 모양이 당신의 어떤 순간, 나아가 삶까지도 편집해버린 데에 대한 슬픔이다. 말의 모양새는 행동이라고 했다. 행동엔 책임이 따른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