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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13 17:23 수정 : 2016.11.13 19:05

김곡의
영화감독

솔직히. 무당이 뭔 죄냐. 동서고금 할 것 없이 몇천년을 민중의 식솔이었던 무당이. 하늘과 땅 사이에 난 빈틈으로 뛰어들어가 운명과 생을 균형잡아주던 무당이. 무당은 균형이다. 무당의 ‘무’(巫) 자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줄 타는 사람을 형상화하고 있지 않는가. ‘접신’도 그렇다. ‘접’(接)! 얼마나 균형 쩌는가. 신에게 매몰되지도 않으면서도 신을 거부하지도 않는, 닿을락 말락, 스칠까 말까 하는 그 오묘한 균형! 그리고 그 균형이야말로 민중에겐 믿음의 행위이자 희망의 형식이었던 게고.

고로 문제는 접신이 균형을 잃을 때 생겨난다. 실제로 접신과 빙의를 이 균형감각의 여부로 구분하는 민속학자들도 있다. 즉 무당은 신을 영접하면서도 자아를 잃지 않기에 ‘접신’하며, 신병 환자는 신에 매몰되어 자아를 잃기에 ‘빙의’된다는 것인데, 바꿔 말해보면 균형 없는 접신은 신병(神病)이나 실혼(失魂)에 다름없다는 의미렷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메시께라. “지나친 접신은 정신건강에 해롭습니다.” 알코올중독처럼 접신중독도 있는 셈이다.

무당학을 정신분석학에 도입하려고 했다가 평생을 재야의 떠돌이로 살아야 했던 카를 융은 -집단무의식의 대평원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개체화(Individuation) 활동을 방해하는- 접신중독의 세 가지 유형을 구분한 바 있다. 첫번째는 신(융은 “집단무의식” 혹은 “원형”이라는 온건한 용어들을 사용했지만)에 압도되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신에 너무 함몰되어 그것을 지나치게 의존하고 믿는 경우이며, 세번째는 신을 너무 거부한 나머지 스스로 위축되는 경우이다. 첫번째 경우가 편집증자나 정신분열자의 사례이고, 두번째 경우는 과대망상증자의 사례이며, 세번째 경우가 퇴행증자의 사례다. 아마도 박근혜씨는 두번째 경우, 과대망상증에 해당될 것이다. 그녀는 정신분열이라기엔 너무도 최순실에게 충실했으며, 퇴행증자라기엔 너무도 국무위원들과 새누리당에 거룩했기 때문이다. 물론 첫번째와 세번째 증상이 뒤섞여서 나타난다는 엄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특히 착어증세나 아스퍼거 증상),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간에 그것은 -융의 개념대로- 집단정신과 개인정신, 신과 개인 사이에서 균형잡음으로서의 ‘개체화’의 실패라는 것이다. 융 말대로라면, 박근혜씨는 국정에 실패하기 이전에, 그 스스로의 개체화에 실패하고 있다. 대부분의 10살 아이들조차 성공한다는 그 개체화에. “지나친 접신은 개체화에 해롭습니다.”

“이 정도 비리는 어느 정권이나 다 있었다”는 일각의 저능아적 반론이 그저 “대통령도 종교의 자유, 접신의 자유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문제는 접신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접신의 중독이며, 그것의 오염이고 전염이며, 그로 인한 대한민국 개체화의 실패다. 그러한 반론자들은 아직도 모른다. 지금 민중이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가, 돈 떼먹는 것까진 참아도 영혼을 떼먹는 건 못 참겠다는 정치인류학적인 격분임과 동시에, 복채인 줄도 모르고 세금을 냈다는 데에 대한 무속공학적 배반감이라는 것을. “지나친 접신은 민주주의에 해롭습니다.”

우리가 박근혜의 하야를 요구하는 것은 그녀의 처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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