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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04 18:17 수정 : 2016.12.04 19:28

영화감독
김곡의 똑똑똑

살다 보면 “앗! 이건 역사야!”라고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위대한 순간이 있다. 이번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는 확실히 그렇다. 단지 87년 6월 항쟁 이후로 최대 규모라서가 아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침착함, 다양함 그리고 유쾌함이 여기에 있다. 단지 머릿수를 헤아리는 ‘양’이 아니라, 무언가 ‘양상’이 바뀐 것이다. 특히 드디어 “장수풍뎅이 연구회”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민주묘총”, “범야옹연대”, “햄네스티 인터내셔널”, “전견련” 등등. 민주노총, 범야권연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전경련이라는 기존의 광장 코드에서 무언가 ‘역사적인 엑소더스’가 일어나고 있다.

사실 패러디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패러디들이 새벽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엄마 깰까 숨죽여 키득대던 ‘은밀한 골방 공간’에서 ‘광장 공간’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무엇보다도 더 이상 개개인의 일상과 사적인 생각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민주노총과 같이 신성한(?) 광장 아이콘을 대상으로 하면서 쏟아져 나온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거의”라고 말한 이유는 전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개죽이 반전시위 참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기실 장수풍뎅이 연구회는 기존의 광장 아이콘에 흡수되기는커녕 거기에 구멍을 낸다. 사실 장수풍뎅이 연구회를 본 우리들의 첫번째 반응은 웃음이다. 그 무의미에 빵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핵심이다. 장수풍뎅이 연구회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것은 다양성의 한 조각으로서의 의미를 현장에서 만들어낸다. 사적 부심들로만 이루어진 “골방 다양성”(방금 만들어본 단어다)이 기존의 근엄한 아이콘 광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허무개그’의 방식.

돌이켜보면 예전 시위 현장에선 어느 정도 공적 코드(이념)의 일치가 중요시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서 흔드는 주먹질이 영 어색하면 시위 나가기도 껄끄러웠던 시절, 회사원인 게, 애엄마인 게, 중학생인 게 중요하지 않고 단지 ‘투사’의 아이콘과 많이 닮으면 되었던 시절이었다. 광장의 코드가 따로 있었고, 광장의 근엄 앞에서 골방의 시시콜콜은 무시될 필요가 있었다. 장수풍뎅이 연구회는 다르다. 그것은 광장을 골방들로 채운다. 공적 공간을 사적 공간들의 다양성으로, 기존의 광장 코드로는 무의미로밖엔 안 읽히는 다양성으로 채우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죽지도 않는다. 장수풍뎅이 연구회가 죽어도 장수하늘소 연구회가, 민주묘총이 죽어도 민주돈총이, 대한민국 골방들의 수만큼의 무한함으로 뒤따라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민주묘총에 가입하기 위해서 더 이상 투사일 필요가 없다. 그냥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는 정치 구도에서도 큰 변화다. 기존 정치 역학은 공과 사, 광장과 골방의 구분에 입각하고 있었다(예컨대 유권자는 골방에서 투표하고, 정치인은 광장에서 대의하며, 이게 뒤섞이는 걸 ‘선동’이라며 금기시해왔다). ‘장수풍뎅이 연구회’의 원대한 정치적 야망은 바로 이 광장과 골방의 오래된 구분에, 그리고 그에 기생하던 “대의”(代議)와 “선동”(煽動)이라는 관념에 빅엿을 먹이는 데에 있으리라. 장수풍뎅이는 아무것도 대의하지 않고, 아무도 선동하지 않는다. 그는 민중과 함께 출몰할 뿐이다. 장수풍뎅이에게 광장은 따로 없다. 그가 가는 곳이 곧 광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무의 광장을 강남 아줌마의 골방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했던 박근혜에게 대항하는 장수풍뎅이의 위대한 허무개그법이다. 그리고 이 개그는 그네의 접신보다 덜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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