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살다보면 변명을 하게 된다. 삶에서 저지르게 되는 실수만큼이나 하게 되는 게 변명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보다 적게 한다면 당신은 쿨가이). 물론 변명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변명을 너무 못해서 민망함을 듣는 사람의 몫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변명을 잘하고 못함이 존재한다는 것, 고로 변명의 기술이 존재한다는 게다. 변명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저질러진 실수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즉 부정할 수 없는 부분과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을 구별해내는 일이다. 예컨대 늦잠 자서 회의에 늦어 변명해야 한다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은 ‘늦었다’는 것이고,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은 ‘늦잠’이다. 전자는 숨길 수 없는 부분이고 후자는 숨길 수 있는 부분이다. 쉽다고? 실수의 양상이 어려워지면 구별은 점점 어려워진다. 가장 애용되는 구별쌍들을 추천한다: 결과와 의도, 행동과 생각, 사실과 기억 등등. 변명의 두 번째 단계는, 그렇게 찾아낸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을 가공하는 단계다. 여기서 핵심은 개연성과 설득력이다.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을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가공시켜야 한다. 예컨대 늦잠 자서 늦은 약속을 “오다 차가 막혔다”고 하는 것이, “오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보단 개연성이 있다(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 극적인 요소를 무리하게 첨가하는 것은 지양하자). 가공의 덕목은, ‘언제나 상위 원칙에 호소하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한국 대도시의 교통체증에 비한다면 이 따위 회의는 아무것도 아냐” “너희들도 언제라도 걸릴 수 있는 게 교통체증이야”라는 뉘앙스를 은근 풍겨서 비난하는 상대를 압도하라. 가장 애용되는 상위 원칙들은, 선의, 무심결, 우연 등이 있다. 내가 가장 잘 애용하는 상위 원칙은 ‘상황’이다. 상황은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상위 체계이기 때문이다(“내 책임만은 아냐. 상황이 그랬다고”). 변명의 세 번째 단계는 가공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는 일이다. “강변북로가 막혔다”고 둘러댔으나 강변북로를 타고 온 사람이 회의에 있을 수 있다! 좋은 변명엔 언제나 좋은 퇴각로가 있다. 퇴각로는 “강변북로”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지 않음으로써, 비규정적인 채로 남겨두는 핑계의 괄호 부분이다. 나는 이것을 회색지대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는 변명의 외연을 무한히 확장하기 위해 양시론과 양비론이 교묘하게 짬뽕이 되는 경계지대이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어떤 도로일 수도 있는 교통체증…”). 괄호가 물렁할수록 변명은 단단해진다. 사실 회색지대는 충돌의 공간이다. 참과 거짓, 의식과 무의식, 법과 도덕이 뒤섞이는 차연(差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변명러’에게 나타나는 “미안하지만, 잘못한 건 아니다”라는 이중적 태도도 이 회색지대로부터 비롯된다. 고로 숙련된 변명러와 비숙련 변명러는 이 이중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숙련 변명러는 이 회색을 역이용하고 변명의 적재적소에 채색함으로써 “미안함”과 “잘못”을 기어코 구별해낸다(“내가 이건 미안하지만, 이건 잘못이 아니다”). 반면 비숙련 변명러는 회색에 압도되고, 결국 “미안함”과 “잘못”의 구별에 실패한다. 전자의 좋은 사례는 우병우다. 후자는 최순실. 둘 다 “국민께 죄송하지만 저는 무죄입니다”라는 ‘변명의 정석’으로 시작하지만, 내공 차이가 현저하다. 물론 가장 으뜸의 변명러는 숙련공도 비숙련공도 아닌, 이 둘 자체를 가려서 쓰는 자이리라. 변명을 잘해서 되는 상황이 있고 변명을 해도 안 먹히는 상황이 있다. 잊지 말자. 가장 좋은 변명러는, 변명이 가능해도 닥쳐야 할 때를 아는 자다.
칼럼 |
[김곡의 똑똑똑] 변명의 구조 |
영화감독 살다보면 변명을 하게 된다. 삶에서 저지르게 되는 실수만큼이나 하게 되는 게 변명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보다 적게 한다면 당신은 쿨가이). 물론 변명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변명을 너무 못해서 민망함을 듣는 사람의 몫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변명을 잘하고 못함이 존재한다는 것, 고로 변명의 기술이 존재한다는 게다. 변명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저질러진 실수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즉 부정할 수 없는 부분과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을 구별해내는 일이다. 예컨대 늦잠 자서 회의에 늦어 변명해야 한다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은 ‘늦었다’는 것이고,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은 ‘늦잠’이다. 전자는 숨길 수 없는 부분이고 후자는 숨길 수 있는 부분이다. 쉽다고? 실수의 양상이 어려워지면 구별은 점점 어려워진다. 가장 애용되는 구별쌍들을 추천한다: 결과와 의도, 행동과 생각, 사실과 기억 등등. 변명의 두 번째 단계는, 그렇게 찾아낸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을 가공하는 단계다. 여기서 핵심은 개연성과 설득력이다.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을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가공시켜야 한다. 예컨대 늦잠 자서 늦은 약속을 “오다 차가 막혔다”고 하는 것이, “오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보단 개연성이 있다(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 극적인 요소를 무리하게 첨가하는 것은 지양하자). 가공의 덕목은, ‘언제나 상위 원칙에 호소하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한국 대도시의 교통체증에 비한다면 이 따위 회의는 아무것도 아냐” “너희들도 언제라도 걸릴 수 있는 게 교통체증이야”라는 뉘앙스를 은근 풍겨서 비난하는 상대를 압도하라. 가장 애용되는 상위 원칙들은, 선의, 무심결, 우연 등이 있다. 내가 가장 잘 애용하는 상위 원칙은 ‘상황’이다. 상황은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상위 체계이기 때문이다(“내 책임만은 아냐. 상황이 그랬다고”). 변명의 세 번째 단계는 가공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는 일이다. “강변북로가 막혔다”고 둘러댔으나 강변북로를 타고 온 사람이 회의에 있을 수 있다! 좋은 변명엔 언제나 좋은 퇴각로가 있다. 퇴각로는 “강변북로”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지 않음으로써, 비규정적인 채로 남겨두는 핑계의 괄호 부분이다. 나는 이것을 회색지대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는 변명의 외연을 무한히 확장하기 위해 양시론과 양비론이 교묘하게 짬뽕이 되는 경계지대이기 때문이다(“대한민국 어떤 도로일 수도 있는 교통체증…”). 괄호가 물렁할수록 변명은 단단해진다. 사실 회색지대는 충돌의 공간이다. 참과 거짓, 의식과 무의식, 법과 도덕이 뒤섞이는 차연(差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변명러’에게 나타나는 “미안하지만, 잘못한 건 아니다”라는 이중적 태도도 이 회색지대로부터 비롯된다. 고로 숙련된 변명러와 비숙련 변명러는 이 이중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숙련 변명러는 이 회색을 역이용하고 변명의 적재적소에 채색함으로써 “미안함”과 “잘못”을 기어코 구별해낸다(“내가 이건 미안하지만, 이건 잘못이 아니다”). 반면 비숙련 변명러는 회색에 압도되고, 결국 “미안함”과 “잘못”의 구별에 실패한다. 전자의 좋은 사례는 우병우다. 후자는 최순실. 둘 다 “국민께 죄송하지만 저는 무죄입니다”라는 ‘변명의 정석’으로 시작하지만, 내공 차이가 현저하다. 물론 가장 으뜸의 변명러는 숙련공도 비숙련공도 아닌, 이 둘 자체를 가려서 쓰는 자이리라. 변명을 잘해서 되는 상황이 있고 변명을 해도 안 먹히는 상황이 있다. 잊지 말자. 가장 좋은 변명러는, 변명이 가능해도 닥쳐야 할 때를 아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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