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자미즘은 잠을 찬양하는 주의(잠+ism)다. 자미즘은 각박하고도 부박한 일과에 감금되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사즉생의 각오로 지켜내야 할 권리이며, 게다가 신의 잠꼬대로 만들어진 이 해괴한 세계에 자동적으로 주어진 천부권이다. 난 자미스트다. 잠을 찬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자미스트는 일과에 지쳐서 눈꺼풀 셔터를 서서히 내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일어낫! 잠은 죽은 다음에도 잘 수 있어!”라고 꾸짖는 상사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자미스트에게 잠이란 생 다음에 ‘주어지는 가치’가 아니라, 생 사이사이에, 그것도 일과 사이사이에, 책상 앞에서, 지하철에서, 휴게실에서,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화장실에서라도 부단히 ‘쟁취해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미즘의 주적은 에디슨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루 4시간의 수면이면 족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함으로써 전인류의 수면시간을 심각하게 단축했다. 근면성실한 위인 같으니라고. 반대로 자미스트는 잠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나태와 힐링을 사랑한다. 잠의 가장 큰 윤리학적 가치는 나태다. 나태의 극한을 경험할수록-즉 꿀잠을 잘수록-당신은 훌륭한 자미스트가 될 수 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던가. 잠잘 때는 똥개도 건드리지 말자. 고로 자미즘 선언문 1조 1항. 잠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자미스트는 마치 잠을 내일을 위한 잠시간의 휴식이라고, 그래서 내일의 행복을 위한 약속어음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세간의 오랜 편견에 저항한다. 잠은 그 자체로, 그 부동과 태만과 힐링만으로도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잠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타임라인으로부터 그 근거와 목적을 빌려올 만큼 가난하지 않다. 좋은 꿀잠은 그 자체로 ‘ZZZ’ 풍년이며, δ-파(델타파) 대만족이다. 이 완전한 행복에 비한다면, 내일이면 온다는 그 행복은 얼마나 불완전하고 비루한 것인가. 내일을 위해서 잠이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어제가 잠을 위해서 있었던 거다. 자미즘 선언문 1조 2항. 잠은 행동이다. 그것도 행동 중의 행동, 즉 ‘왕행동’이다. 깨어나고 출근하고 일하고 갈굼당하고 퇴근하고 씻고 티브이 보다가 잠드는 것만이 행동이 아니다. 이 모든 행동을 깔끔하게 정리정돈하고, 행여나 있었을 앙금과 미련을 청소한다는 것만으로도 잠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보다도, 안중근 의사의 거사만큼이나 거대한 행동이다. 자미즘 선언문 1조 3항. 잠의 목표는 꿈이다. 이것이 잠이 행동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다. 잠은 언제나 꿈을 목표로 하기에, 행동이다. 힐링이 꿈의 부산물이 아님에 주의하라. 꿈을 꾼다는 그 몸짓 자체가 이미 셀프 힐링이다. “전 꿈을 잘 안 꾸는데, 자미스트의 자격이 없는 걸까요?”라며 절망하는 초보 자미스트들이여. 좌절하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이미 렘 상태에서 수십 수백 번의 꿈을 꾸었다. 단지 아침에 기억나지 않을 뿐. 자미스트들은 이 모든 잠의 혁명적 가치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또 폄하하는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가끔은 엄마가 늦잠을, 가끔은 상사가 쪽잠을, 가끔은 상관이 도둑잠을 비난하시며, 잠의 위대함을 폄훼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꿀잠을 새우잠과 거래하고서, 자미즘의 배반자가 될 것인가?! 멀게는 엠시스퀘어, 가깝게는 수면양말과 수면쿠션 등이 세계 각처에 이미 매복 중인 우리 자미스트들의 은밀한 화력지원들이다. 그대 졸릴 순 있어도 외롭진 않다. 만국의 자미스트들이여, 단결하라!
칼럼 |
[김곡의 똑똑똑] 자미즘 선언문 |
영화감독 자미즘은 잠을 찬양하는 주의(잠+ism)다. 자미즘은 각박하고도 부박한 일과에 감금되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사즉생의 각오로 지켜내야 할 권리이며, 게다가 신의 잠꼬대로 만들어진 이 해괴한 세계에 자동적으로 주어진 천부권이다. 난 자미스트다. 잠을 찬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자미스트는 일과에 지쳐서 눈꺼풀 셔터를 서서히 내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일어낫! 잠은 죽은 다음에도 잘 수 있어!”라고 꾸짖는 상사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자미스트에게 잠이란 생 다음에 ‘주어지는 가치’가 아니라, 생 사이사이에, 그것도 일과 사이사이에, 책상 앞에서, 지하철에서, 휴게실에서,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화장실에서라도 부단히 ‘쟁취해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미즘의 주적은 에디슨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루 4시간의 수면이면 족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함으로써 전인류의 수면시간을 심각하게 단축했다. 근면성실한 위인 같으니라고. 반대로 자미스트는 잠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나태와 힐링을 사랑한다. 잠의 가장 큰 윤리학적 가치는 나태다. 나태의 극한을 경험할수록-즉 꿀잠을 잘수록-당신은 훌륭한 자미스트가 될 수 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던가. 잠잘 때는 똥개도 건드리지 말자. 고로 자미즘 선언문 1조 1항. 잠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자미스트는 마치 잠을 내일을 위한 잠시간의 휴식이라고, 그래서 내일의 행복을 위한 약속어음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세간의 오랜 편견에 저항한다. 잠은 그 자체로, 그 부동과 태만과 힐링만으로도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잠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타임라인으로부터 그 근거와 목적을 빌려올 만큼 가난하지 않다. 좋은 꿀잠은 그 자체로 ‘ZZZ’ 풍년이며, δ-파(델타파) 대만족이다. 이 완전한 행복에 비한다면, 내일이면 온다는 그 행복은 얼마나 불완전하고 비루한 것인가. 내일을 위해서 잠이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어제가 잠을 위해서 있었던 거다. 자미즘 선언문 1조 2항. 잠은 행동이다. 그것도 행동 중의 행동, 즉 ‘왕행동’이다. 깨어나고 출근하고 일하고 갈굼당하고 퇴근하고 씻고 티브이 보다가 잠드는 것만이 행동이 아니다. 이 모든 행동을 깔끔하게 정리정돈하고, 행여나 있었을 앙금과 미련을 청소한다는 것만으로도 잠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보다도, 안중근 의사의 거사만큼이나 거대한 행동이다. 자미즘 선언문 1조 3항. 잠의 목표는 꿈이다. 이것이 잠이 행동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다. 잠은 언제나 꿈을 목표로 하기에, 행동이다. 힐링이 꿈의 부산물이 아님에 주의하라. 꿈을 꾼다는 그 몸짓 자체가 이미 셀프 힐링이다. “전 꿈을 잘 안 꾸는데, 자미스트의 자격이 없는 걸까요?”라며 절망하는 초보 자미스트들이여. 좌절하지 말지어다. 그대들은 이미 렘 상태에서 수십 수백 번의 꿈을 꾸었다. 단지 아침에 기억나지 않을 뿐. 자미스트들은 이 모든 잠의 혁명적 가치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또 폄하하는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가끔은 엄마가 늦잠을, 가끔은 상사가 쪽잠을, 가끔은 상관이 도둑잠을 비난하시며, 잠의 위대함을 폄훼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꿀잠을 새우잠과 거래하고서, 자미즘의 배반자가 될 것인가?! 멀게는 엠시스퀘어, 가깝게는 수면양말과 수면쿠션 등이 세계 각처에 이미 매복 중인 우리 자미스트들의 은밀한 화력지원들이다. 그대 졸릴 순 있어도 외롭진 않다. 만국의 자미스트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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