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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05 16:33 수정 : 2017.03.05 19:19

김곡
영화감독

경칩이다. 집 앞 도랑에서 개구리가 하늘을 향한 번지점프를 감행했다. 중력도 모르는 꿈틀꾸러기 같으니라고. 옆집 도롱뇽, 뒷집 반달곰, 전국경칩행동본부의 각 지부 모든 꿈틀이들까지 합치면, 전국 팔도가 꿈틀꿈틀 우글우글 왁자지껄 중중무진(重重無盡)인 게다. 무거울 중(重)이 두 번이나 들어갔으니, 전국의 개구리 형제자매님들 참으로 중력을 홀대한다. 뉴턴이 사색할 때가 경칩이기만 했어도 아폴로 11호 발사는 하루 이틀 정도 연기되었을 수도 있겠다. 개구리 알 찾아 먹으며 봄맞이하는 데 한나절 정도는 투자해야 하니까.

민주주의 모델은 사실 친환경?엄밀히 말하면 친경칩(?)- 정치모델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그가 밟고 서 있는 질량과 그 중력에 입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중무진 민중이라는 중력이다. 이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기실 군중(mass)과 질량(mass)은 같은 말이다. 이것이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계들과 다를 수 있었고, 그 격조와 품격을 뽐낼 수 있었던 이유다. 민주주의는 오직 중력에서 나와서 중력으로 돌아가는 거의 유일한 정치모델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질량에만 근거하고, 질량만을 목표로 한다(즉 민중…). 민주주의는 만중인력(萬衆引力)의 법칙이다. 뉴턴이 다행히도 경칩은 아니었던 그날에 거대질량(지구)을 향해 낙하하는 사과를 발견했을 때, 민주주의의 과학적 원리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미친 소리일까? 사과가 떨어진다. 지구가 아니라. 민주주의는 민중이 이끄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함정도 바로 거기에 있을 터다. 즉슨 너무도 당연해서 그렇게도 잊고 살기 쉽다는 것. 사실 우리가 살면서 중력에 감사하는 일은 많지 않다. 중력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걸어갈 수도, 그토록 사랑하는 마루 소파에 누울 수도 없는데도. 간단한 시뮬레이션으로도 중력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지구 질량의 절반 정도 되는 소행성이 지구로 접근한다고 했을 때,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던 중력은 이내 사라지고 바닷물까지 하늘 위로 빨려 올라간다고 하니까. 태평양의 바닷물 방울방울과 함께 승천하면서 우리는 너무 늦게 되뇌게 될까. 그래. 당연한 것은 없었다. 중력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구는 그만의 질량으로 중력을 버티고 있었던 게고, 그만큼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면서 말 그대로 헌신하고 투신하고 있었던 게라고.

이것은 마치 병이 나봐야 몸의 존재(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서 의식조차 하지 않던…)를 알아차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력을 상실해봐야 그토록 당연하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되뇔 것인가.

이번 정권의 참사는 그들이 중력을 너무도 ‘쌩깠다’는 데에 있다. 기실 공중부양의 기운으로 수립된 정권이었다. <그래비티>란 영화가 있었다. 무중력 상태를 부유하는 우주 미아 독백서다. 박근혜씨가 세월호 분양소를 찾았을 때, 그리고 청와대와 방송국이 사운드(아마도 민중의 아우성)를 지웠을 때, 그들은 진정 중력을 지우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능력 정부가 아니라 무중력 정부다. 무중력, 이것이 그네의 오만함이다.

경칩의 개구리는 차라리 중력에 대한 겸손이다. 겨울에 대지에 엎드려 있다가 봄이 되어서야 꿈틀대니. 개구리는 중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개구리 자신이 이미 중력이다. 그는 지구를 수놓는, 봄의 중력인 게다. 한국 민주주의도 경칩이기를. 영원히 왁자지껄 중중무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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