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죽이고 싶다. 진정으로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 단지 비유가 아니라, 정말이지 내 온몸을 던져서라도, 아니 내 살과 뼈를 토해내고 척추를 접어서라도 죽이고 싶다. 당신은 이 정도의 살의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저 친구끼리 하는 “죽인다” “죽는다”라는 일상적 표현 말고, 진정으로 상대가 괴로워하며 소멸하는 그 순간을 목도하고픈, 그가 괴로워하면서 스러져가는 그 시간과 비명이 더 길어지고 늘어난다면, 그 쾌감은 증폭될 것만 같은 그런 진짜 살의. 난 있다. 지금도 있다. 심지어 난 지금 그놈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좀 죽이고 싶다. 내 척추를 접어서라도 죽이고 싶다. 진정. 솔직히 무좀인지 습진인지 분명치도 않다. 분명한 것은 저놈이 몇 년째 나에게 기생하는 악마요 바이러스라는 것, 그리고 쉽게 퇴각할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기도비닉하다가도 내 빈틈을 노리고 엄습해오는 매복공격 스킬은 발전해가고 있다.(특히 내가 잠잘 때와 술 마실 때의 빈틈이 타깃이다.) 처음엔 나도 맹공을 퍼부었다. 동네에 용하다는 약국을 돌아다니며 저놈에게 퍼부을 연고만 몇십만원어치를 샀을 게다. 스테로이드? 부작용? 그딴 건 개의치 않았다. 난 저, 저놈을 죽일 일념으로 사고 또 사고, 바르고 또 발랐다. 그러나 승리는 언제나 저놈의 것이었으니, 결국 난 병원을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들은 작전참모(의사 선생님)의 충격적인 조언: “이놈은 굳은살 밑으로 숨은 지 오랩니다. 겉면에다 포탄을 퍼부어봤자 소용없죠. 이놈은 이미 속살 깊이 존재하니까요.” 아. 아. 아. 아. 아. 난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애먼 약을 사는 데 애먼 돈을 탕진해가며, 나만을 공격해왔다는 사실을. 정작 저 바이러스는 나의 굳은살 밑에 기도비닉한 채 쾌재만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책과 회한으로 널브러져 있던 나의 시선이 가닿은 것은, 대학 때 폼 잡는다고 읽던 베르그송이었다. 베르그송은 말한다. 기억은 원뿔 모양으로 생겼는데, 오래된 기억일수록 마치 퇴적되듯 원추의 밑동 쪽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원추 밑면에 닿을 정도로 그 꼭짓점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져서 다시 꺼내 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어떤 “순수기억”이 존재한다고. 나의 무좀이 바로 그런 “순수기억” 같은 놈이었다. 내 속살 깊숙이 파고들어 이젠 피부 표층에서 아무리 소환해도 꿈쩍도 않는 저놈, 피부를 벗겨내고 겉살을 뜯어내지 않는 이상 잡히지 않을 만큼 깊숙이 침윤해버린 저놈, 그러나 여전히 나의 현재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저놈. 돌아보니 한국인의 최근 사유 패턴도 이와 비슷하다. 우린 습관적으로 오늘과 미래를 말하지만, 결단의 순간이 오면 정작 과거와 기억으로 돌아서곤 했다. 그것도, 너무 멀어져버려서 이제 신화가 되어버린 그러한 과거 말이다. 4차 산업을 얘기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강바닥을 뒤집는 삽질의 역군 이미지를 선택했고,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새마을운동 장군님 이미지를 선택했다. 우린 결정적 순간에 순수기억, 즉 순수한 과거-이미지를 선택하는 버릇이 있는 게다. 대가는 크다. 얄팍한 이미지의 공백을 파고드는 무좀과도 같은 바이러스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최순실이었다. 게다가 우린 그걸 캐내기 위해 민주주의의 겉살까지 도려내는 아픔을 겪었다. 심지어 아직 덜 도려냈을 수도. 내 무좀이야 목초액이라는 신통방통약을 찾아서 이제 좀 희망이 보인다고 치지만, 한국 민주주의를 위한 목초액이란 무엇일진대. 민중의 끝없는 경계심과, “우리의 척추를 접어서라도 끝장낸다”는 각오의 과거-이미지에 대한 결별선언이 아니라면.
칼럼 |
[김곡의 똑똑똑] 죽이고 싶다 |
영화감독 죽이고 싶다. 진정으로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 단지 비유가 아니라, 정말이지 내 온몸을 던져서라도, 아니 내 살과 뼈를 토해내고 척추를 접어서라도 죽이고 싶다. 당신은 이 정도의 살의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저 친구끼리 하는 “죽인다” “죽는다”라는 일상적 표현 말고, 진정으로 상대가 괴로워하며 소멸하는 그 순간을 목도하고픈, 그가 괴로워하면서 스러져가는 그 시간과 비명이 더 길어지고 늘어난다면, 그 쾌감은 증폭될 것만 같은 그런 진짜 살의. 난 있다. 지금도 있다. 심지어 난 지금 그놈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좀 죽이고 싶다. 내 척추를 접어서라도 죽이고 싶다. 진정. 솔직히 무좀인지 습진인지 분명치도 않다. 분명한 것은 저놈이 몇 년째 나에게 기생하는 악마요 바이러스라는 것, 그리고 쉽게 퇴각할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기도비닉하다가도 내 빈틈을 노리고 엄습해오는 매복공격 스킬은 발전해가고 있다.(특히 내가 잠잘 때와 술 마실 때의 빈틈이 타깃이다.) 처음엔 나도 맹공을 퍼부었다. 동네에 용하다는 약국을 돌아다니며 저놈에게 퍼부을 연고만 몇십만원어치를 샀을 게다. 스테로이드? 부작용? 그딴 건 개의치 않았다. 난 저, 저놈을 죽일 일념으로 사고 또 사고, 바르고 또 발랐다. 그러나 승리는 언제나 저놈의 것이었으니, 결국 난 병원을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들은 작전참모(의사 선생님)의 충격적인 조언: “이놈은 굳은살 밑으로 숨은 지 오랩니다. 겉면에다 포탄을 퍼부어봤자 소용없죠. 이놈은 이미 속살 깊이 존재하니까요.” 아. 아. 아. 아. 아. 난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애먼 약을 사는 데 애먼 돈을 탕진해가며, 나만을 공격해왔다는 사실을. 정작 저 바이러스는 나의 굳은살 밑에 기도비닉한 채 쾌재만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책과 회한으로 널브러져 있던 나의 시선이 가닿은 것은, 대학 때 폼 잡는다고 읽던 베르그송이었다. 베르그송은 말한다. 기억은 원뿔 모양으로 생겼는데, 오래된 기억일수록 마치 퇴적되듯 원추의 밑동 쪽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원추 밑면에 닿을 정도로 그 꼭짓점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져서 다시 꺼내 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어떤 “순수기억”이 존재한다고. 나의 무좀이 바로 그런 “순수기억” 같은 놈이었다. 내 속살 깊숙이 파고들어 이젠 피부 표층에서 아무리 소환해도 꿈쩍도 않는 저놈, 피부를 벗겨내고 겉살을 뜯어내지 않는 이상 잡히지 않을 만큼 깊숙이 침윤해버린 저놈, 그러나 여전히 나의 현재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저놈. 돌아보니 한국인의 최근 사유 패턴도 이와 비슷하다. 우린 습관적으로 오늘과 미래를 말하지만, 결단의 순간이 오면 정작 과거와 기억으로 돌아서곤 했다. 그것도, 너무 멀어져버려서 이제 신화가 되어버린 그러한 과거 말이다. 4차 산업을 얘기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강바닥을 뒤집는 삽질의 역군 이미지를 선택했고,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새마을운동 장군님 이미지를 선택했다. 우린 결정적 순간에 순수기억, 즉 순수한 과거-이미지를 선택하는 버릇이 있는 게다. 대가는 크다. 얄팍한 이미지의 공백을 파고드는 무좀과도 같은 바이러스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최순실이었다. 게다가 우린 그걸 캐내기 위해 민주주의의 겉살까지 도려내는 아픔을 겪었다. 심지어 아직 덜 도려냈을 수도. 내 무좀이야 목초액이라는 신통방통약을 찾아서 이제 좀 희망이 보인다고 치지만, 한국 민주주의를 위한 목초액이란 무엇일진대. 민중의 끝없는 경계심과, “우리의 척추를 접어서라도 끝장낸다”는 각오의 과거-이미지에 대한 결별선언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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