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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16 19:15 수정 : 2017.04.16 19:19

김곡
영화감독

신파에선 항상 뭔가 돌아온다. 헤어졌던 연인이 돌아오고, 집 나갔던 며느리가 돌아오고, 보육원에 보냈던 아이가 돌아온다. 같은 상황이 시어머니-며느리에서 아버지-아들로, 남자-여자로, 엄마-아이로 그 배역만 조금씩 바꾸면서 끊임없이 돌아온다. 이쯤 하면 안 돌아올 만도 한데, 이수일도 심순애도,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도 끊임없이 돌고 돌고 돈다. 가장 잘 돌아오는 것은 제작자와 관객들이다. 그 뻔한 이야기로 제작자들은 끊임없이 돌아오고, “또 뻔한 신파구만”이라고 투덜대면서 관객들은 끊임없이 티브이 앞으로, 스크린 앞으로 돌아온다. 신파는 반복에 사로잡혀 있다. 신파는 문자 그대로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이다.

영화비평가들은 신파가 “감정의 작위적 반복”이라고 비아냥대지만, 그들 역시 막장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 티브이 앞으로 돌아가서 그 반복을 몸소 실천해주시거니와, 엄밀히 말해선 반복 자체가 작위적이므로 저 정의 자체엔 오류가 있다. 실상 신파에서 반복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운명(運命, 말 그대로 ‘돈다’)이다. 운명은 인간의 대지에 속하지 않으므로 천명(天命)이고, 하늘의 뜻이다. 운명, 그가 천명이고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아>(장일호 감독)에서 잘 먹고 잘살던 어머니를 심장병으로 갑자기 고꾸라뜨리고, 잘 먹고 잘살던 본처를 철분결핍성 빈혈로 갑자기 고꾸라뜨리며, 이도 모자라 시아버지를, 손자를, 엄마를 끊임없이, 심지어 별 개연성 없이도 그리 쉽게 쓰러뜨리는 저승사자는 누구란 말인가? 운명은 마치 “이 정도 반복으로는 어림도 없지!”라고 중얼거리며 매번 돌아오는, 그리고 그때마다 대지에 난 균열들을 제 맘대로 재조정하는 하늘님인 것 같다.

흥미로운 건, 이놈의 하늘은 균열난 대지의 재조정자인 척하지만, 실상 그 최초의 균열을 만든 최초의 사고뭉치라는 것이다. 신파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연인들의 사랑은 어긋나고 아이는 잘못 태어나지만 이 죄에는 죄인이 딱히 없어야 한다는 게다. 아, 물론 재벌집안 시어머니가 가끔씩 악역을 맡지만, 그것도 임시적일 뿐이다. 그녀도 그리 악역을 하는 합리적 이유가 있고, 무엇보다도 끝내 반성하고 뉘우친다. 즉 신파에선 잘못을 하는 놈도, 잘못을 끊임없이 교정하려는 놈도 모두 하늘이란 거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 신파는 하늘을 ‘감옥’이면서 동시에 ‘집’인 괴이한(uncanny!!!!) 공간으로 묘사하는 것이리라.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이원세 감독)에서 하늘은 지평선에 선 아이들을 끊임없이 짓누르면서도, 끝내 그들을 껴안는 엄마 품이 된다. 아아아. 알다가도 모를 이놈, 대지를 지진처럼 뒤흔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또 안아주는 이놈, 하늘이여.

결국 하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만 남는다. 난 잘 모르겠다. 신파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그는 사고를 치기도 하고 그를 교정하기도 하면서, 끝없이 반복된다는 사실뿐. 영화와 드라마에선 모르겠으나, 현실에선 하늘이 누구인지를 알겠다. 특히 선거가 돌아오는 요즘 같은 때엔. 현실의 하늘님은 민중이다. 사고를 쳤으나 그를 교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오는, 아무리 정치인들이 “미워도 다시 한 번” 돌아오는. 옥석을 가려서 대지의 평온에 방해되는 정치인이라면 아무런 극적 개연성 없이, 그리 쉽게 고꾸라뜨리는 우리, 민주주의의 진정한 저승사자, 유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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