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일감이 불규칙한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폭풍 같은 노동이 지나가고 난 뒤엔 내일이면 다시 ?이젠 4포 세대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잉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룰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잉여 신세의 핑계를 찾기 위해 꺼내드는 책은 <자본론>. 이 책만큼이나 ‘잉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책도 없기 때문이다(손창섭의 <잉여인간>은 위대한 작품이나 ‘잉여’란 말에 매우 인색하니 불면증에 고통 받는 잉여들에겐 비추한다). 1권을 다 읽고 나니 일단 찾아오는 것은 안도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잉여노동과 필요노동의 분할로 정의하며, 잉여축적을 역사적 산물로 말하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이다. 내 신세도 역사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래, 다른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정도 잉여는 아니었다구. 이 안도감을 살리고 살리며 숙면 돌입해볼까…’라며 잠을 청하려는 순간, 하나 거슬리는 게 있으니 바로 ‘잉여’ 뒤에 붙은 ‘노동’이란 말이다. 잉여가 자본주의의 순수한 발명품일 뿐이라면, 마르크스는 왜 굳이 ‘잉여’ 뒤에 ‘노동’이라고 동어반복을 했을까. 다시 1권을 펴들고 내친김에 2권까지 읽어보니 헐. 잉여가 자본주의를 정의한다는 말만 있지, 잉여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잉여가 자본주의의 발견일 뿐이라는 뉘앙스만 잔뜩 풍기고 있다. 생각해보니 잉여는 존재의 본성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이전부터 계모임을 해왔던 이유다. 게다가 시나리오도 띄엄띄엄 5일 쓰는 것보다 몰아서 5일 쓰는 게 더 생산성이 높고, 휴가도 띄엄띄엄 5일보다 줄줄이 5일이 더 잘 논다. 잉여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노동의 본질이었던 거다(마르크스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잉여일 놈은 자본주의 밖에 태어났어도 똑같은 잉여였을 거라고, 마르크스는 말하는 것인가. 마르크스에게 배반감을 느끼며 3권에 들어서니, 이제 그는 괴이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과잉자본, 과잉축적, 과잉인구… 온갖 종류의 잉여 모둠세트가 이윤율 저하 법칙을 구성한다나 뭐라나.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부분에 달려들어 몇십년을 갑론을박했다지만, 요지는 나 같은 잉여 신세가 남아돌아서, 즉 생산설비가 남아돌고, 산업예비군이 남아돌고, 소비되지 못한 상품과 불불노동(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노동) 시간이 남아돌아서 자본주의가 폭망한다는 게다(마르크스는 “남아돎” 대신 “자본의 유기적 구성[c/v]의 고도화”라는 폼나는 용어를 쓴다). 잉여가 자본주의를 건국했지만 이젠 잉여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것처럼 말하는 마르크스, 그대는 깍쟁이. 실제로 마르크스는 잉여를 폭탄에 비유하기도 한다. 잉여는 시스템의 산파인 동시에 시한폭탄인 셈이다. 하긴 마르크스 자신도 잉여였다. 게다가 나 또한 오늘 낮에 노는 시간을 못 참고 친구들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정치인들을 욕하고, 세상을 욕하고, 역적모의(?)를 공상했고. 남아돈다는 것은 남아서 ‘돈다’는 게다. 우리의 말들, 생각과 욕망, ‘산노동’이 범람하고, 이 힘들의 유통 속에서 잉여 신세는 잉여 권리가 된다. 사전투표율이 26%를 ‘초과’했다. 그 자체로 잉여현상이고, 세상에 던지는 우리들의 폭탄이다. 숙면 돌입.
칼럼 |
[김곡의 똑똑똑] 마르크스도 잉여였다 |
영화감독 일감이 불규칙한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폭풍 같은 노동이 지나가고 난 뒤엔 내일이면 다시 ?이젠 4포 세대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잉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룰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잉여 신세의 핑계를 찾기 위해 꺼내드는 책은 <자본론>. 이 책만큼이나 ‘잉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책도 없기 때문이다(손창섭의 <잉여인간>은 위대한 작품이나 ‘잉여’란 말에 매우 인색하니 불면증에 고통 받는 잉여들에겐 비추한다). 1권을 다 읽고 나니 일단 찾아오는 것은 안도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잉여노동과 필요노동의 분할로 정의하며, 잉여축적을 역사적 산물로 말하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이다. 내 신세도 역사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래, 다른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정도 잉여는 아니었다구. 이 안도감을 살리고 살리며 숙면 돌입해볼까…’라며 잠을 청하려는 순간, 하나 거슬리는 게 있으니 바로 ‘잉여’ 뒤에 붙은 ‘노동’이란 말이다. 잉여가 자본주의의 순수한 발명품일 뿐이라면, 마르크스는 왜 굳이 ‘잉여’ 뒤에 ‘노동’이라고 동어반복을 했을까. 다시 1권을 펴들고 내친김에 2권까지 읽어보니 헐. 잉여가 자본주의를 정의한다는 말만 있지, 잉여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잉여가 자본주의의 발견일 뿐이라는 뉘앙스만 잔뜩 풍기고 있다. 생각해보니 잉여는 존재의 본성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이전부터 계모임을 해왔던 이유다. 게다가 시나리오도 띄엄띄엄 5일 쓰는 것보다 몰아서 5일 쓰는 게 더 생산성이 높고, 휴가도 띄엄띄엄 5일보다 줄줄이 5일이 더 잘 논다. 잉여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노동의 본질이었던 거다(마르크스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잉여일 놈은 자본주의 밖에 태어났어도 똑같은 잉여였을 거라고, 마르크스는 말하는 것인가. 마르크스에게 배반감을 느끼며 3권에 들어서니, 이제 그는 괴이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과잉자본, 과잉축적, 과잉인구… 온갖 종류의 잉여 모둠세트가 이윤율 저하 법칙을 구성한다나 뭐라나.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부분에 달려들어 몇십년을 갑론을박했다지만, 요지는 나 같은 잉여 신세가 남아돌아서, 즉 생산설비가 남아돌고, 산업예비군이 남아돌고, 소비되지 못한 상품과 불불노동(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노동) 시간이 남아돌아서 자본주의가 폭망한다는 게다(마르크스는 “남아돎” 대신 “자본의 유기적 구성[c/v]의 고도화”라는 폼나는 용어를 쓴다). 잉여가 자본주의를 건국했지만 이젠 잉여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것처럼 말하는 마르크스, 그대는 깍쟁이. 실제로 마르크스는 잉여를 폭탄에 비유하기도 한다. 잉여는 시스템의 산파인 동시에 시한폭탄인 셈이다. 하긴 마르크스 자신도 잉여였다. 게다가 나 또한 오늘 낮에 노는 시간을 못 참고 친구들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정치인들을 욕하고, 세상을 욕하고, 역적모의(?)를 공상했고. 남아돈다는 것은 남아서 ‘돈다’는 게다. 우리의 말들, 생각과 욕망, ‘산노동’이 범람하고, 이 힘들의 유통 속에서 잉여 신세는 잉여 권리가 된다. 사전투표율이 26%를 ‘초과’했다. 그 자체로 잉여현상이고, 세상에 던지는 우리들의 폭탄이다. 숙면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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