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알파고가 또 이겼나 보다. 처음엔 그저 그냥 신기하던 것이 이제 슬슬 흠좀무. ‘한두 번은 져줘야지 양심도 없이…’라는 얄미움에 뒤져보니, 고수들이 두었던 기보 몇만개를 외우고는, 그걸 스스로 다시 연습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조합들에서 길 찾는 연습을 겁나게 했단다. 그것도 잠도 안 자고. 실상 인공지능(AI)의 무서움도 여기에 있다. 다른 기계와 달리 인공지능은 자가학습을 한다. 인풋에서 아웃풋을 내는 단순한 함수가 아니라, 인풋을 아웃풋으로 되먹는 피드백의 함수로 인간의 뇌를 모방한다는 의미다.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운다는, 즉 세계와의 밀당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인간 고유의 권리마저 모방해내는, 인공지능은 깍쟁이. 실제로 미국 언어철학자 존 설은 인공지능의 기본구조가 밀당임을 보여주었다.(‘중국인 방’ 실험) 물론, 로봇공학과 신경과학의 발전에 의존해야 할, 욕망과 신체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바로 그러한 밀당력 덕분에 인공지능은 단지 지성만이 아니라 상상력, 기억력, 그에 대한 반응들로서의 감정을 모방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기억과 상상을 포함한 소통 자체가 모두 피드백, 즉 밀당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완벽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완전성에서, 그 실수에서 온다. 사랑은 밀당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바로 그러한 구조로 태어나는 놈이라니, 뭔들 못 따라 하겠나. 실제로 일본에선 초보적인 수준의 애완견 AI가 이미 출시되었다. 아마도 그 어설픈 소통이 그놈의 귀여움을 증폭시키리라.(왜냐하면 사랑은 밀당이니까)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알파고의 발달 속도로 보건대, 곧이어 더 정교한 애완 AI가 나올 수도 있다. 집에 들어서면 정말 꼬리를 흔들고, 밥을 안 주면 시름시름 앓고, 신경을 안 써주면 투정을 부리는, 실수와 못난이 짓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밀당. 물론 신체가 없어도 좋다. 그놈이 인간의 인풋과 자신의 아웃풋을 진정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대화와 소통을 대리하는 가상의 신호체계가 규약처럼 설정되고 공증되면 그만인 게다.(왜냐하면, 다시 한 번, 사랑은 밀당이니까) 아마도 밀당하는 인공지능은 인공지능 대중화의 가장 첫걸음이 될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혼밥족, 혼술족이 늘어나는 이 시대는 그를 위한 충분한 수요도 갖추고 있고. 가상성이 실제 소통의 공백을 메우는 게다.(왜냐하면, 또 또 또, 사랑은 밀당이니까) 아마도 모자란 출산율도 메꿔주지 않을까? 즉 애완 AI를 넘어서 낳고 기르는 AI. 옹알이도 밀당이니까. 그로써 인공지능은 만인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아들과 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자본주의에선 화폐가 그런 것처럼 인간의 모든 관계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관계 자체를 대체하며 인간들을 이어주는, 마치 오늘 아침에 탄 지하철에서 이미 사람들이 각자의 핸드폰을 연인과 벗 삼아서 각자 대화하고 있었던 것처럼. 충분히 가능하다. 지성과 사랑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이해 없이도. 왜냐하면, 또 또 또 또, 소통과 사랑은 단지 밀당이니까. (면면히 깔려 있는 염세주의에 사과드린다. 하지만 실제로 과학자들이 소통을 진솔성과 상호신뢰와 같은 인간적 관념으로 가정하지 않고, 조금 더 복잡할 뿐이지 여전히 기계적인 밀당으로 가정한 덕분에 인공지능은 발달해왔다. 당신이 연인의 손보다 빈번하게 쥐고 있는 그 스마트폰도 포함해서.)
칼럼 |
[김곡의 똑똑똑] 인공지능은 밀당한다 |
영화감독 알파고가 또 이겼나 보다. 처음엔 그저 그냥 신기하던 것이 이제 슬슬 흠좀무. ‘한두 번은 져줘야지 양심도 없이…’라는 얄미움에 뒤져보니, 고수들이 두었던 기보 몇만개를 외우고는, 그걸 스스로 다시 연습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조합들에서 길 찾는 연습을 겁나게 했단다. 그것도 잠도 안 자고. 실상 인공지능(AI)의 무서움도 여기에 있다. 다른 기계와 달리 인공지능은 자가학습을 한다. 인풋에서 아웃풋을 내는 단순한 함수가 아니라, 인풋을 아웃풋으로 되먹는 피드백의 함수로 인간의 뇌를 모방한다는 의미다.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운다는, 즉 세계와의 밀당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인간 고유의 권리마저 모방해내는, 인공지능은 깍쟁이. 실제로 미국 언어철학자 존 설은 인공지능의 기본구조가 밀당임을 보여주었다.(‘중국인 방’ 실험) 물론, 로봇공학과 신경과학의 발전에 의존해야 할, 욕망과 신체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바로 그러한 밀당력 덕분에 인공지능은 단지 지성만이 아니라 상상력, 기억력, 그에 대한 반응들로서의 감정을 모방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기억과 상상을 포함한 소통 자체가 모두 피드백, 즉 밀당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완벽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완전성에서, 그 실수에서 온다. 사랑은 밀당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바로 그러한 구조로 태어나는 놈이라니, 뭔들 못 따라 하겠나. 실제로 일본에선 초보적인 수준의 애완견 AI가 이미 출시되었다. 아마도 그 어설픈 소통이 그놈의 귀여움을 증폭시키리라.(왜냐하면 사랑은 밀당이니까)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알파고의 발달 속도로 보건대, 곧이어 더 정교한 애완 AI가 나올 수도 있다. 집에 들어서면 정말 꼬리를 흔들고, 밥을 안 주면 시름시름 앓고, 신경을 안 써주면 투정을 부리는, 실수와 못난이 짓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밀당. 물론 신체가 없어도 좋다. 그놈이 인간의 인풋과 자신의 아웃풋을 진정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대화와 소통을 대리하는 가상의 신호체계가 규약처럼 설정되고 공증되면 그만인 게다.(왜냐하면, 다시 한 번, 사랑은 밀당이니까) 아마도 밀당하는 인공지능은 인공지능 대중화의 가장 첫걸음이 될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혼밥족, 혼술족이 늘어나는 이 시대는 그를 위한 충분한 수요도 갖추고 있고. 가상성이 실제 소통의 공백을 메우는 게다.(왜냐하면, 또 또 또, 사랑은 밀당이니까) 아마도 모자란 출산율도 메꿔주지 않을까? 즉 애완 AI를 넘어서 낳고 기르는 AI. 옹알이도 밀당이니까. 그로써 인공지능은 만인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아들과 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자본주의에선 화폐가 그런 것처럼 인간의 모든 관계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관계 자체를 대체하며 인간들을 이어주는, 마치 오늘 아침에 탄 지하철에서 이미 사람들이 각자의 핸드폰을 연인과 벗 삼아서 각자 대화하고 있었던 것처럼. 충분히 가능하다. 지성과 사랑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이해 없이도. 왜냐하면, 또 또 또 또, 소통과 사랑은 단지 밀당이니까. (면면히 깔려 있는 염세주의에 사과드린다. 하지만 실제로 과학자들이 소통을 진솔성과 상호신뢰와 같은 인간적 관념으로 가정하지 않고, 조금 더 복잡할 뿐이지 여전히 기계적인 밀당으로 가정한 덕분에 인공지능은 발달해왔다. 당신이 연인의 손보다 빈번하게 쥐고 있는 그 스마트폰도 포함해서.)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