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워드프로세서의 저항할 수 없는 진보에도 불구하고, 개요만은 꼭 손글씨로 쓰는 버릇이 있다(이 글의 개요를 써나가는 지금도 이면지에 끄적이는 중이다). 내 맘대로 단락을 나누고 붙이기도 하며, 내 맘대로 첨삭을 가하는 데는 손글씨의 자유로움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길을 찾아나가는 개요쓰기에선 더더욱 그렇다. 또한 손글씨엔 그렇게 가해진 나누고 붙이기와 첨삭의 흔적이 남는다. 가령 한 문장을 떼었다가 다른 단락으로 옮겨 붙인다고 했을 때, 문장을 통째로 옮기지 않고서 그 문장과 그것이 넣어질 부분을 선으로 이어주면 된다. 손글씨에 의해서 글 전체는 조각들과 틈새들, 그 사이 교차로와 이음선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지도가 된다. 워드프로세서는 안 되고 손글씨는 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생각의 결과물로서 문장들을 쌓아가는 워드프로세서와 달리, 손글씨는 그 문장들이 흩어지고 모이는 과정들, 즉 글쓰기의 과정 자체를 그려낸다. 워드프로세서가 선형편집이라면, 손글씨는 비선형편집인 셈이다. 물론 손글씨로 그려낸 이 지도는 대부분 미로의 형태다. 이음선들이 문장들을 건너뛰며 사방팔방으로 이어져 있고, 행간들은 다음 길을 위한 교차로가 되어가며, 마치 출구를 가리키는 단서라도 되는 양 메모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생각의 미로. 하지만 여기에 손글씨의 가장 강력한 신비가 있다. 바로 그 이음선, 교차로, 단서는 일종의 ‘강렬도’를 지니는 게다.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을 잇는 이음선은 ?한 번의 주장번복을 인정하는- 이미 하나의 주저함이다. 게다가 이음선도 다 같은 이음선이 아니다. 얼마나 진하게 혹은 엷게 그리느냐에 따라서 이음선은 확신에 차 있을 수도 있고, 여전히 주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길을 알려준답시고 글 옆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메모들도 마찬가지다. 조심스러울 때 글씨는 위축되어 작아지고, 확신에 찰 땐 글씨는 일필휘지로 휘갈겨진다. 손글씨에서 하나의 선, 하나의 공란, 괄호, 글씨체, 그 크기와 농도까지, 일종의 “어조”나 “뉘앙스”를 이루며 글 전체의 “자세”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글쓴이가 글 읽는 이를 대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손은 글에게 어떤 접촉과 어루만짐을 부여하고, 반대로 글은 바로 그 순간에 품어지는 확신이나 회의, 기쁨이나 우울을 머금는다. 손글씨는 몸글씨다. 이 지도의 자취들은 그 등고선 하나하나가 내 자세를 지시하는, 내 몸의 자취들이기 때문이다. 키보드 점타로 박아넣는 컴퓨터 화면의 디지털 글자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다. 키보드 타점과 글자 간에는 어떠한 신체적 유사성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 손글씨에선 내 손의 동선이 그대로 글씨를 이루는 궤적을 이룬다. 글씨는 내 몸과 생각의 움직임, 즉 이 순간의 내 자세를 모사해냄으로써만 태어난다. 손글씨는 일종의 춤 같은 것이다.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글자가 아닌, 종이를 무대로 해서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의 차차차”. 얼추 지도가 완성되었다. 이젠 키보드의 점타로 이 지도를 옮겨볼 작정이다. 불행히도 우린 다시 인쇄된 글자만을 보게 되겠으나, 30분간 방방 뛰고 굴렀던 몸짓의 일부라도 전해지기를. 으레 그랬다는 듯이.
칼럼 |
[김곡의 똑똑똑] 손글씨 |
영화감독 워드프로세서의 저항할 수 없는 진보에도 불구하고, 개요만은 꼭 손글씨로 쓰는 버릇이 있다(이 글의 개요를 써나가는 지금도 이면지에 끄적이는 중이다). 내 맘대로 단락을 나누고 붙이기도 하며, 내 맘대로 첨삭을 가하는 데는 손글씨의 자유로움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길을 찾아나가는 개요쓰기에선 더더욱 그렇다. 또한 손글씨엔 그렇게 가해진 나누고 붙이기와 첨삭의 흔적이 남는다. 가령 한 문장을 떼었다가 다른 단락으로 옮겨 붙인다고 했을 때, 문장을 통째로 옮기지 않고서 그 문장과 그것이 넣어질 부분을 선으로 이어주면 된다. 손글씨에 의해서 글 전체는 조각들과 틈새들, 그 사이 교차로와 이음선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지도가 된다. 워드프로세서는 안 되고 손글씨는 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생각의 결과물로서 문장들을 쌓아가는 워드프로세서와 달리, 손글씨는 그 문장들이 흩어지고 모이는 과정들, 즉 글쓰기의 과정 자체를 그려낸다. 워드프로세서가 선형편집이라면, 손글씨는 비선형편집인 셈이다. 물론 손글씨로 그려낸 이 지도는 대부분 미로의 형태다. 이음선들이 문장들을 건너뛰며 사방팔방으로 이어져 있고, 행간들은 다음 길을 위한 교차로가 되어가며, 마치 출구를 가리키는 단서라도 되는 양 메모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생각의 미로. 하지만 여기에 손글씨의 가장 강력한 신비가 있다. 바로 그 이음선, 교차로, 단서는 일종의 ‘강렬도’를 지니는 게다.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을 잇는 이음선은 ?한 번의 주장번복을 인정하는- 이미 하나의 주저함이다. 게다가 이음선도 다 같은 이음선이 아니다. 얼마나 진하게 혹은 엷게 그리느냐에 따라서 이음선은 확신에 차 있을 수도 있고, 여전히 주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길을 알려준답시고 글 옆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메모들도 마찬가지다. 조심스러울 때 글씨는 위축되어 작아지고, 확신에 찰 땐 글씨는 일필휘지로 휘갈겨진다. 손글씨에서 하나의 선, 하나의 공란, 괄호, 글씨체, 그 크기와 농도까지, 일종의 “어조”나 “뉘앙스”를 이루며 글 전체의 “자세”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글쓴이가 글 읽는 이를 대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손은 글에게 어떤 접촉과 어루만짐을 부여하고, 반대로 글은 바로 그 순간에 품어지는 확신이나 회의, 기쁨이나 우울을 머금는다. 손글씨는 몸글씨다. 이 지도의 자취들은 그 등고선 하나하나가 내 자세를 지시하는, 내 몸의 자취들이기 때문이다. 키보드 점타로 박아넣는 컴퓨터 화면의 디지털 글자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다. 키보드 타점과 글자 간에는 어떠한 신체적 유사성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 손글씨에선 내 손의 동선이 그대로 글씨를 이루는 궤적을 이룬다. 글씨는 내 몸과 생각의 움직임, 즉 이 순간의 내 자세를 모사해냄으로써만 태어난다. 손글씨는 일종의 춤 같은 것이다.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글자가 아닌, 종이를 무대로 해서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의 차차차”. 얼추 지도가 완성되었다. 이젠 키보드의 점타로 이 지도를 옮겨볼 작정이다. 불행히도 우린 다시 인쇄된 글자만을 보게 되겠으나, 30분간 방방 뛰고 굴렀던 몸짓의 일부라도 전해지기를. 으레 그랬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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