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처음엔 코가 시큰거려서 그저 가을의 센치함인 줄 알았다. 기침이 시작되었을 땐 요새 담배가 늘어서 그런 줄 알았다. 잘 때까지 기침이 이어지고 심지어 내 기침에 스스로 깰 때는 내가 기침하는 꿈을 꾼 줄 알았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기침이 줄어들지 않길래 위장에 구멍이 나서 약이 들어가는 족족 새는 줄 알았다. 특히 드디어 마른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을 때, 헉. 특수효과인 줄 알았다. 감기는 인류가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전염병이라 백신도 없단다. 과학적 법칙으로도 모두 소탕되지 않는 그의 끈질김이 우리에겐 신비가 되는 것 같다. 감기의 위대함은 우리의 일상을 단지 불편하게 하는 데에 있질 않다. 일상이 불편해진다 함은 지갑을 잊고 나와서 버스를 못 탈 때나, 새로 산 냄비가 생각보다 작아 라면 끓일 때마다 애를 먹을 때나 쓰는 말이다. 감기는 우리의 일상을 말 그대로 강탈하고 훔쳐간다. 그 방식이 경이롭다. 감기는 기침으로 항생제를 요청하고, 항생제는 소화장애를 유발하고, 소화장애는 절식을 불러오고, 절식은 에너지를 떨어뜨리고, 에너지의 고갈은 다시 기침을 증폭시키고, 기침의 증가는 다시 항생제를 요청하고…. 악순환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일상이 진행되는 직선에서 양 끝을 붙잡아 맞붙이고 악순환의 폐쇄 회로 속에서 빙빙 돌게 하는 것, 이것이 감기가 일상을 훔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냉각수 펌프와 발전기가 동시에 고장 나서 수리하기가 곤란해진 자동차와도 같다. 발전기를 수리하자니 냉각수가 안 돌고, 냉각수 펌프를 고치자니 충전이 안 되는 악순환 속에서 수리의 희망은 ㅃㅇ(빠이). 여기에 감기의 위대한(?) 효과도 있을 터다. 감기는 일상의 사이클을 훔쳐감으로써 육체가 한낱 자동차임을, 즉 내가 소유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도둑맞을 수도 있는 소유물임을 드러내 준다. 그건 거의 <흥부전>에서 놀부가 맡는 역할과 흡사한 것으로서, 좋게 말하면 육체의 객관화이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육체의 타자화다. 그도 그럴 것이 감기가 오시기 전까지 난 얼마나 내 몸을 흡사 그것이 당연한 양, 심지어 그에 대한 의심조차 없이도 맘껏 누리고 굴리고 놀렸는가. 하지만 막상 감기가 오시면 ‘나=육체’의 등식은, 그 등호가 도둑맞음에 따라 금세 깨져버리고, ‘나’는 더 이상 내가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 ‘육체’를 망연자실 바라보고만 있다. 뭐든지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하는데, 감기의 경우엔 그 대상이 내 몸인 셈이다. 영원한 나의 소유물이라고 가정되었고, 그 덕분에 소유물인지도 모르고 지내던 그것이, 사실은 소유물이라는 사실로 인해 박탈될 수도 있음, 이것이 비단 감기뿐만 아니라 고통이 맡은 역할일 터다. 감기는 고통의 그중 가장 연한 배역이다. 가장 짧고도 짙은 배역은 신체손괴와 질병이다. 늙음은 그중 가장 완만하면서도 기나긴 배역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느린, 그러나 그만큼 불가항력적인 육체박탈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 육체가 나의 것만은 아님을, 감기의 제 증상이 특수효과인 게 아니라 반대로 내 육체의 소유가 특수효과였음을, 그래서 육체란 더더욱 소중히 굴려야 할 대여물 혹은 임차물임을 드러내기, 난 이것이 감기의 백신이 없는 이유라 믿는다. 쿨럭.
칼럼 |
[김곡의 똑똑똑] 감기 |
영화감독 처음엔 코가 시큰거려서 그저 가을의 센치함인 줄 알았다. 기침이 시작되었을 땐 요새 담배가 늘어서 그런 줄 알았다. 잘 때까지 기침이 이어지고 심지어 내 기침에 스스로 깰 때는 내가 기침하는 꿈을 꾼 줄 알았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기침이 줄어들지 않길래 위장에 구멍이 나서 약이 들어가는 족족 새는 줄 알았다. 특히 드디어 마른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을 때, 헉. 특수효과인 줄 알았다. 감기는 인류가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전염병이라 백신도 없단다. 과학적 법칙으로도 모두 소탕되지 않는 그의 끈질김이 우리에겐 신비가 되는 것 같다. 감기의 위대함은 우리의 일상을 단지 불편하게 하는 데에 있질 않다. 일상이 불편해진다 함은 지갑을 잊고 나와서 버스를 못 탈 때나, 새로 산 냄비가 생각보다 작아 라면 끓일 때마다 애를 먹을 때나 쓰는 말이다. 감기는 우리의 일상을 말 그대로 강탈하고 훔쳐간다. 그 방식이 경이롭다. 감기는 기침으로 항생제를 요청하고, 항생제는 소화장애를 유발하고, 소화장애는 절식을 불러오고, 절식은 에너지를 떨어뜨리고, 에너지의 고갈은 다시 기침을 증폭시키고, 기침의 증가는 다시 항생제를 요청하고…. 악순환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일상이 진행되는 직선에서 양 끝을 붙잡아 맞붙이고 악순환의 폐쇄 회로 속에서 빙빙 돌게 하는 것, 이것이 감기가 일상을 훔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냉각수 펌프와 발전기가 동시에 고장 나서 수리하기가 곤란해진 자동차와도 같다. 발전기를 수리하자니 냉각수가 안 돌고, 냉각수 펌프를 고치자니 충전이 안 되는 악순환 속에서 수리의 희망은 ㅃㅇ(빠이). 여기에 감기의 위대한(?) 효과도 있을 터다. 감기는 일상의 사이클을 훔쳐감으로써 육체가 한낱 자동차임을, 즉 내가 소유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도둑맞을 수도 있는 소유물임을 드러내 준다. 그건 거의 <흥부전>에서 놀부가 맡는 역할과 흡사한 것으로서, 좋게 말하면 육체의 객관화이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육체의 타자화다. 그도 그럴 것이 감기가 오시기 전까지 난 얼마나 내 몸을 흡사 그것이 당연한 양, 심지어 그에 대한 의심조차 없이도 맘껏 누리고 굴리고 놀렸는가. 하지만 막상 감기가 오시면 ‘나=육체’의 등식은, 그 등호가 도둑맞음에 따라 금세 깨져버리고, ‘나’는 더 이상 내가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 ‘육체’를 망연자실 바라보고만 있다. 뭐든지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하는데, 감기의 경우엔 그 대상이 내 몸인 셈이다. 영원한 나의 소유물이라고 가정되었고, 그 덕분에 소유물인지도 모르고 지내던 그것이, 사실은 소유물이라는 사실로 인해 박탈될 수도 있음, 이것이 비단 감기뿐만 아니라 고통이 맡은 역할일 터다. 감기는 고통의 그중 가장 연한 배역이다. 가장 짧고도 짙은 배역은 신체손괴와 질병이다. 늙음은 그중 가장 완만하면서도 기나긴 배역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느린, 그러나 그만큼 불가항력적인 육체박탈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 육체가 나의 것만은 아님을, 감기의 제 증상이 특수효과인 게 아니라 반대로 내 육체의 소유가 특수효과였음을, 그래서 육체란 더더욱 소중히 굴려야 할 대여물 혹은 임차물임을 드러내기, 난 이것이 감기의 백신이 없는 이유라 믿는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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