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아아아. 천재적이다. 원작자는 미상이나, 저 입에 착착 붙는 마력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서 수많은 변주 버전들을 낳았다. 프로토타입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할머니가 굴뚝으로 숨었는데, 할아버지가 할머니 이름을 부르며 “메리, 그리숨었수?” 그러나 지나치게 추상적인 세팅 때문에 알레고리가 아쉽다면, 위 버전을 산타 할아버지와 산타 할머니로 변주한 버전을 추천한다. 게다가 그 계보학적 디테일들을 첨가하여 루돌프로 변주한 버전도 있으니― 루돌프 이전엔 개가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를 끌었는데, 크리스마스 출격 날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개가 보이질 않자, 개의 이름을 부르며 “메리, 그리숨었수?” 산타 할아버지는 영영 메리를 찾을 수 없어서 루돌프로 전격 교체했다는 문맥 없이 슬픈(?) 이야기. 물론 모든 버전들엔 논리적 흠결들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흠결은 어떤 버전에서도 할아버지는 한국말을 하는데, 그가 찾는 할머니나 강아지 이름은 메리라는 것. 산타 할아버지가 국제결혼이라도 한 것인가. 하지만 흠결들이 “메리, 그리숨었수”의 마력을 지울 순 없는데, 그 외국스러움과 한국스러움의 혼종성이야말로 그 마력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사실 크리스마스를 “그리숨었수”로 변용하는 것은, 최근 “아재 개그”라는 명칭이 붙기 훨씬 이전부터 몇몇 고수들에 의해서 선구되고 있던 기술들이다. 예컨대 ‘안토니오 반데라스’에서 ‘안토니오 반만데라스’(자매품 ‘안토니오 밥다됐쓰’),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과 그랬대’, ‘오사마 빈라덴’에서 ‘옷삶아 빛나데’, ‘여자라서 행복해요’에서 ‘여자라서 햄볶아요’ 등등. 하지만 단지 “그리숨었수”가 아니라 “메리, 그리숨었수”다. 메리라는 외국 여성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붙는 것은, “그리숨었수”라는 한국말, 그것도 어르신들이 쓰실 법한 구수한 경어로서, 흡사하다 만 듯한 반쪽짜리 번역의 애매성의 마력을 이룬다. 그래. 산타 할아버지는 국제결혼이라도 한 것이다. 그만큼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어떤 혼종적 결연의 축제로서 향유된다. 실상 크리스마스는 서구의 명절이지만 한국에서는 추석과 설날에 맞먹는(혹은 그를 뛰어넘는) 축제가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신앙의 종류도 뛰어넘는다. 절에 다니는 우리 고모도 이날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쓰며, 니체를 읊고 블랙메탈을 듣던 무신론자들도 이날은 친구와 애인을 만나서 캐럴을 부른다. 골수 한국인도 “메리”를 찾는 날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숨었수?”― 의문문이다. 그것도 상대의 위치, 상태, 안녕, 생사(?)를 묻는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서로에 대해 숨기게 되는 이 세상에서, 숨어 있던 상대를 찾아내는 시간, 그에 따라 나 자신도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시간이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노출되었던 바로 그 시간처럼,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성탄에 국한시키지 않고,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는 신념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화해를 끄집어내는 모든 인연의 탄생으로 확장시킨다. 아기 예수가 억울해할까. 난 비록 무신론자지만 아기 예수야말로 이러한 확장을 가장 기뻐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찾아준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고고성(呱呱聲)이기 때문이다. 메리, 그리숨었수. 응애응애.
칼럼 |
[김곡의 똑똑똑] 메리 그리숨었수 |
영화감독 아아아. 천재적이다. 원작자는 미상이나, 저 입에 착착 붙는 마력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서 수많은 변주 버전들을 낳았다. 프로토타입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할머니가 굴뚝으로 숨었는데, 할아버지가 할머니 이름을 부르며 “메리, 그리숨었수?” 그러나 지나치게 추상적인 세팅 때문에 알레고리가 아쉽다면, 위 버전을 산타 할아버지와 산타 할머니로 변주한 버전을 추천한다. 게다가 그 계보학적 디테일들을 첨가하여 루돌프로 변주한 버전도 있으니― 루돌프 이전엔 개가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를 끌었는데, 크리스마스 출격 날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개가 보이질 않자, 개의 이름을 부르며 “메리, 그리숨었수?” 산타 할아버지는 영영 메리를 찾을 수 없어서 루돌프로 전격 교체했다는 문맥 없이 슬픈(?) 이야기. 물론 모든 버전들엔 논리적 흠결들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흠결은 어떤 버전에서도 할아버지는 한국말을 하는데, 그가 찾는 할머니나 강아지 이름은 메리라는 것. 산타 할아버지가 국제결혼이라도 한 것인가. 하지만 흠결들이 “메리, 그리숨었수”의 마력을 지울 순 없는데, 그 외국스러움과 한국스러움의 혼종성이야말로 그 마력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사실 크리스마스를 “그리숨었수”로 변용하는 것은, 최근 “아재 개그”라는 명칭이 붙기 훨씬 이전부터 몇몇 고수들에 의해서 선구되고 있던 기술들이다. 예컨대 ‘안토니오 반데라스’에서 ‘안토니오 반만데라스’(자매품 ‘안토니오 밥다됐쓰’),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과 그랬대’, ‘오사마 빈라덴’에서 ‘옷삶아 빛나데’, ‘여자라서 행복해요’에서 ‘여자라서 햄볶아요’ 등등. 하지만 단지 “그리숨었수”가 아니라 “메리, 그리숨었수”다. 메리라는 외국 여성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붙는 것은, “그리숨었수”라는 한국말, 그것도 어르신들이 쓰실 법한 구수한 경어로서, 흡사하다 만 듯한 반쪽짜리 번역의 애매성의 마력을 이룬다. 그래. 산타 할아버지는 국제결혼이라도 한 것이다. 그만큼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어떤 혼종적 결연의 축제로서 향유된다. 실상 크리스마스는 서구의 명절이지만 한국에서는 추석과 설날에 맞먹는(혹은 그를 뛰어넘는) 축제가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신앙의 종류도 뛰어넘는다. 절에 다니는 우리 고모도 이날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쓰며, 니체를 읊고 블랙메탈을 듣던 무신론자들도 이날은 친구와 애인을 만나서 캐럴을 부른다. 골수 한국인도 “메리”를 찾는 날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숨었수?”― 의문문이다. 그것도 상대의 위치, 상태, 안녕, 생사(?)를 묻는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서로에 대해 숨기게 되는 이 세상에서, 숨어 있던 상대를 찾아내는 시간, 그에 따라 나 자신도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시간이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노출되었던 바로 그 시간처럼,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성탄에 국한시키지 않고,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는 신념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화해를 끄집어내는 모든 인연의 탄생으로 확장시킨다. 아기 예수가 억울해할까. 난 비록 무신론자지만 아기 예수야말로 이러한 확장을 가장 기뻐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찾아준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고고성(呱呱聲)이기 때문이다. 메리, 그리숨었수. 응애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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