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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4 18:02 수정 : 2018.02.04 19:05

김곡
영화감독

살다 보면 무심결에 찌질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집에 와서는 반성 차원의 이불킥. 찌질함은 쪽팔림이나 어색함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우린 쪽팔림만 가지고 이불킥을 하진 않는다. 찌질함은 질적으로 다른 상황을 지시하므로 이불킥을 부대효과로 지닌다. 진정한 찌질러들은 이불을 덮지 않는다. 이불킥에 남아나질 않기 때문이다.

다른 유사 개념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전문 찌질러들이 대대손손 전하는 ‘찌질함’의 엄밀한 정의를 들어보자(평균적인 상황만을 다루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 그들은 구멍이 난 이불을 부여잡으며, 찌질함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역설한다.

첫째, 능력이 없을 때 사람은 찌질해진다. 데이트는 나갔는데 돈이 없어서 연인이 마침 가자고 했던 대형마트에서 시식코너로 배를 때웠다면 그건 쪽팔림, 어색함과 질적으로 다른 찌질함의 차원이다. 회사 사람들과 막상 밥은 먹었는데 지갑에 돈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신발 끈을 묶자. 그것도 오래 묶자. 이미 잘 묶여 있다면 풀었다가 다시 묶자. 찌질해진다.

그러나 둘째 측면은 능력의 부재 상황보다 더 근원적인 찌질함의 영역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지가 없을 때다. 능력과 의지는 다르다. 철학적으로도 다르다. 이미 2천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구분하며 ‘의지박약’(akrasia)이라는 멋진 개념을 남겨 찌질학의 큰 정초를 이루셨다.

‘의지박약’!!! 아아.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음운을 고막에 접신하는 것만으로도 온몸 구석구석, 온 핏줄 켜켜이 찌질함이 전해져 온다. 아들아,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 모르겠습니다. 이 찌질한 녀석. 매우 적절한 활용이다. 친구여, 짜장면을 시킬까 짬뽕을 시킬까. 모르겠습니다. 이 찌질한 녀석. 역시 적절한 활용이다. 모든 결정장애엔 어느 정도의 찌질함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의지가 없을 때, 능력이 없을 때보다 사람은 더 찌질해진다.

그러나 찌질러들이 피와 눈물로 써 내려갔던 이 정의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능력과 의지의 부재가 곧바로 찌질함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 두 측면으로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찌질함이란 능력과 의지의 부조화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엄밀히 말해서 찌질함은 단지 능력의 부재에 있질 않고, 의지는 있는데 능력이 없다는 데에 있다. 밥은 먹고 싶으면서 돈이 없는 위 상황이 그렇다.

더 심각한 경우는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을 때다. 매우 괴이하고도 드문 경우지만(왜냐하면 의지박약은 능력을 파괴변형시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있긴 있다. 눈떠보니 재벌 3세로 태어났네.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고 아빠 카드로 슈퍼카나 사서 자유로나 달려야지. 찌질하다. 멋있어 보이겠으나, 멋있을수록 찌질함, 이것이 의지박약이 불러오는 찌질함의 가장 무서움이다.

어떤 경우에서도 의지의 부재는 능력의 부재를 압도한다. 의지박약은 찌질함의 심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의지박약은 욕망의 목적이 없거나 알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반대로 의지만 있다면 능력은 알아서 찾아진다). 그런 점에서 찌질학의 가장 훌륭한 테제는 마왕이 남긴 저 말이다. “그 나이를 퍼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대답할 수 없다면 찌질러다. 이불만은 포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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