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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20 22:40 수정 : 2018.05.20 22:49

김곡
영화감독

“야 이 개×× 같은 ×××. 죽어. 미친 ×××. 어휴 ×× 같은 ×××××× 개×× 죽어라! 죽어라!” 저 ‘××’ 부분, 무슨 내용이었을까, 너무도 알고 싶어졌다. 분기탱천한 절규 중간중간 삐- 소리로 지워져 있던 저 수수께끼의 부호들, 너무도 알고 싶다. 해독하고 싶다. ‘개’ 그다음에 뭐였을까? 개나리? 개구리? 개선문? 개이득? 아아. 미치도록 알고 싶다.

짐승 소리나 김경호 샤우팅에 많이 비교들 하시지만, 개인적으로는 데스메탈 그라울링도 간간이 들린다고 첨언하고 싶지만, 그래도 인간의 소리라 가정해보자. 인간이 저 정도의 울분과 포효를 끌어내는 것은 매우 극한적인 상황에서다. 소유권 같은 기본권이 박탈되는 한계상황 말이다. 저것은 분명 소유물을 빼앗긴 자의 절규다. 크게는 사기를 당해 전답을 빼앗긴 자의 울분이요, 작게는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울분이다. 분명 둘 중에 하나다.

분명 이명희의 샤우팅은 소유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지금 내 손안에 있어야 할 소유물이 없어진 데에 대한, 최소한 소유물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소유물이길 거부한 데에 대한 놀라움이고 분노이며 탄원이다. 그의 아들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어찌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느냐는 순진한 반론도 있겠으나, 샤우팅의 논리는 몹시 엄밀하고도 일관된다. ‘너희들은 내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다니는 회사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내 것이다, 왜냐하면 지분이 내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또 지분으로 쪼개기 전에도 내 거였는데, 애초부터 내 아버지 혹은 내 남편, 우리 할아버지 거였기 때문이다, 우쒸, 우리 아빠 거니까 내 거, 회사도 내 거, 유리컵도 내 거, 땅콩도 내 거, 비행기도 내 거. 내 거도 내 거…’

이것은 사적 소유의 샤우팅이다. 조씨 일가는 경영권뿐만 아니라 저 사적 소유 관념을 승계하였다. 사적 소유는 공적 소유와 대립하는 관념이다. 그것은 사회적 공공성, 책임감 따위는 개나리나 줘버리고, 소유권을 처분권과 분연히 일치시킨다. 인간을, 달면 빨고 쓰면 뱉을 수 있는 사탕으로, 내 맘대로 처분가능한 물건으로 간주토록 한다. 사적 소유는 법보다는 자본주의에 입각한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독점을 장려하는 건 자본주의지 헌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벌’이란 용어도 이를 뒷받침한다. 최고경영자는 최고로 부자인 자다. 소유가 경영을, 경영은 고용을 정당화하므로, 너희를 해고할 수 있는 내가 너희들의 소유자다. 요컨대 너희들은 내 노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가 소유한 회사의 소유물들이기 때문이다. 캬아. 이 얼마나 일관된 논리인가.

사적 소유물이 내 맘대로 되지 않고 내 손으로부터 빠져나갈 때의 그 상실감, 그 울분, 절규. 저 ‘××’의 수수께끼가 이젠 풀렸다. 그건 ‘노예’였다. “야 이 개노예 같은 노예들. 죽어. 미친 노예들. 어휴 노예 같은 노예노예들의 개노예 죽어라!”

‘내 거’라는 사적 소유 관념은 유아기 발달을 거치며 공공성의 관념과 함께 누그러진다고 한다. 사탕을 빼앗겨도 울지 않을 수 있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능력과 소유에 상응하는 책임감이 발달한다는 말이렷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적 소유물이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저리 진정성 있게 포효했던 조씨 일가, 죄인이 아닙니다. 발달지체아일 뿐입니다. 사적 소유에 대한 가정교육이 너무나 훌륭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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