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심각한 길치다. 초행길을 찾아갈 때면, 남들 3분이면 찾을 길을 30분씩 헤매다 가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밥을 먹고 나오면 오른쪽에서 왔는지 왼쪽에서 왔는지부터 헷갈린다. 한번은 선배들과 술 한잔하다 뒤늦게 합류하는 일행을 데리러 나왔다가, 일행과 함께 그 호프집을 못 찾아 들어간 적도 있다. 지도를 보면 되지 않겠냐는 충언은 사양한다. 어차피 눈으로 봐도 모르는 길, 그림으로 봐도 모른다. 길을 알려주려는 충고자는 나와 적이 되어간다. 내 왼쪽이 왼쪽이고 내 오른쪽이 오른쪽일진대, 어디가 왼쪽이고 어디가 오른쪽이란 건가. 네가 어딘지부터 말해. 내가 어딘지를 모르겠다고. 아아. 어딘지도 모르면서 왜 자꾸 가는 거야, 거기서 멈춰. 몰라. 내 다리가 막 움직여. 아아아. 오 유레카. 이 와중에 저기 뭔가 보여. 야 이 새우깡. 거긴 네가 아까 출발한 데잖아, 아아아아. 길치는 공간치와는 다르다. 실제로 난 주차도 잘하고, 렌즈도 잘 고르거니와, 거리감이 좋은 편이다. 길은 거리가 아니다. 거리는 공간을 썩둑썩둑 잘라낸 덩어리들 혹은 그 간격들인 반면, 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르는 방향성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걸 써먹어보자면, 거리는 스칼라이고, 길은 벡터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거리는 머릿속에서 주물럭주물럭하여 더하고 뺄 수 있지만, 길은 더하거나 뺄 수가 없고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선택할 뿐이다. 길은 향함이고 갈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치를 선택장애라고 볼 수도 없다. 실제로 난 큰 결정은 겁도 없이 순풍순풍 잘하는 편인데다가, 길의 선택장애는 길치가 악화된 결과이지 그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길치들이 방향감을 잃는 데에는 심리적인 것 외의 다른 이유가 있으며, 그건 분명히 공간의 속성과도 관련이 있다. 나를 예로 들어보자면, 난 아직도 기억한다. 그 호프집에서 나오던 순간, 그 네온사인들, 오가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은 거리에 사람이 많네’라고 생각했던 것, 이어 ‘오늘은 꼭 돌아가는 길을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것, 또 후발대 일행들을 만나자 반갑다며 와락 포옹하던 것, 물론 뒤이어 길을 헤매던 나 자신이 흘리던 식은땀까지. 모든 요소들이 한 장의 스냅샷처럼 남아 있다. 난 공간과 공간 사이의 위치와 방향 대신에, 공간들이 뭉뚱그려진 풍경을 기억한 셈이다. 바로 여기에 길치가 길치인 이유가 있을 터다. 주변의 길치들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길을 그래픽으로만 기억한다. 길치들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위치는 까먹어도 총체적인 풍경, 그 안에서의 느낌 혹은 생각만은 기억한다. 길치들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길을 길로 보지 않는다. 풍경의 일부로 볼 뿐. 길치가 길치인 건, 방향감과 풍경감을 엿 바꿔 먹었기 때문이다. 풍경감을 차라리 ‘분위기’라고 말해도 좋겠다. 우리 길치는 선택장애자가 아니다. 분위기를 타다가 길 타는 걸 잊었을 뿐. 선거다. 민주주의에선 으레 가장 중요한 길찾기 이벤트. 물론 호프집 찾기와 선거의 길찾기는 분명 다른 것이다. 전자엔 정해진 목표점이 정답처럼 존재하지만, 후자엔 정답이란 게 따로 없고, 우리가 찾는 길이 언제나 정답이 된다(고로 정답이 오답으로 뒤바뀔 때 책임져야 할 이들도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일까. 길치는 투표장에선 더 유리하다. 분위기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길치여도 세상은 길치면 안 된다는, 내일의 그래픽은 오늘보단 나아야 한다는, 내 안의 분위기 말이다.
칼럼 |
[김곡의 똑똑똑] 길치 |
영화감독 심각한 길치다. 초행길을 찾아갈 때면, 남들 3분이면 찾을 길을 30분씩 헤매다 가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밥을 먹고 나오면 오른쪽에서 왔는지 왼쪽에서 왔는지부터 헷갈린다. 한번은 선배들과 술 한잔하다 뒤늦게 합류하는 일행을 데리러 나왔다가, 일행과 함께 그 호프집을 못 찾아 들어간 적도 있다. 지도를 보면 되지 않겠냐는 충언은 사양한다. 어차피 눈으로 봐도 모르는 길, 그림으로 봐도 모른다. 길을 알려주려는 충고자는 나와 적이 되어간다. 내 왼쪽이 왼쪽이고 내 오른쪽이 오른쪽일진대, 어디가 왼쪽이고 어디가 오른쪽이란 건가. 네가 어딘지부터 말해. 내가 어딘지를 모르겠다고. 아아. 어딘지도 모르면서 왜 자꾸 가는 거야, 거기서 멈춰. 몰라. 내 다리가 막 움직여. 아아아. 오 유레카. 이 와중에 저기 뭔가 보여. 야 이 새우깡. 거긴 네가 아까 출발한 데잖아, 아아아아. 길치는 공간치와는 다르다. 실제로 난 주차도 잘하고, 렌즈도 잘 고르거니와, 거리감이 좋은 편이다. 길은 거리가 아니다. 거리는 공간을 썩둑썩둑 잘라낸 덩어리들 혹은 그 간격들인 반면, 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르는 방향성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걸 써먹어보자면, 거리는 스칼라이고, 길은 벡터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거리는 머릿속에서 주물럭주물럭하여 더하고 뺄 수 있지만, 길은 더하거나 뺄 수가 없고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선택할 뿐이다. 길은 향함이고 갈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치를 선택장애라고 볼 수도 없다. 실제로 난 큰 결정은 겁도 없이 순풍순풍 잘하는 편인데다가, 길의 선택장애는 길치가 악화된 결과이지 그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길치들이 방향감을 잃는 데에는 심리적인 것 외의 다른 이유가 있으며, 그건 분명히 공간의 속성과도 관련이 있다. 나를 예로 들어보자면, 난 아직도 기억한다. 그 호프집에서 나오던 순간, 그 네온사인들, 오가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은 거리에 사람이 많네’라고 생각했던 것, 이어 ‘오늘은 꼭 돌아가는 길을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것, 또 후발대 일행들을 만나자 반갑다며 와락 포옹하던 것, 물론 뒤이어 길을 헤매던 나 자신이 흘리던 식은땀까지. 모든 요소들이 한 장의 스냅샷처럼 남아 있다. 난 공간과 공간 사이의 위치와 방향 대신에, 공간들이 뭉뚱그려진 풍경을 기억한 셈이다. 바로 여기에 길치가 길치인 이유가 있을 터다. 주변의 길치들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길을 그래픽으로만 기억한다. 길치들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위치는 까먹어도 총체적인 풍경, 그 안에서의 느낌 혹은 생각만은 기억한다. 길치들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길을 길로 보지 않는다. 풍경의 일부로 볼 뿐. 길치가 길치인 건, 방향감과 풍경감을 엿 바꿔 먹었기 때문이다. 풍경감을 차라리 ‘분위기’라고 말해도 좋겠다. 우리 길치는 선택장애자가 아니다. 분위기를 타다가 길 타는 걸 잊었을 뿐. 선거다. 민주주의에선 으레 가장 중요한 길찾기 이벤트. 물론 호프집 찾기와 선거의 길찾기는 분명 다른 것이다. 전자엔 정해진 목표점이 정답처럼 존재하지만, 후자엔 정답이란 게 따로 없고, 우리가 찾는 길이 언제나 정답이 된다(고로 정답이 오답으로 뒤바뀔 때 책임져야 할 이들도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일까. 길치는 투표장에선 더 유리하다. 분위기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길치여도 세상은 길치면 안 된다는, 내일의 그래픽은 오늘보단 나아야 한다는, 내 안의 분위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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