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20 09:30
수정 : 2019.01.21 13:14
김곡의 똑똑똑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미투 운동이 불러오는 충격과 경악에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심석희 선수? 내가 아는 그 귀여운 소녀 선수 말인가. 직종의 특성상 어린 모습부터 보게 되어 마치 친숙한 옆집 꼬마 친구처럼 여겨지던 그 선수, 그 순박함 뒤에는 어마어마한 노력과 열정이 숨어 있음을 잘 알기에 그녀가 빙상을 질주할 때면 함성과 응원에 존경심을 동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 심석희 선수 말인가.
빙상계 미투가 가지는 충격의 특이성은 그 직종의 특성에서 온다. 스포츠 선수들은 무대 위에 서는 이들이다. 우리가 보지 못할 일이 없고 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성폭력이 우리 모두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고, 일어난 뒤에도 시선이 가닿지 못하는 곳으로 망각되어 사라지는 평균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심석희 선수를 포함한 빙상의 희생자들은 우리 모두가 보는 곳에 서 있었다. 심석희 선수의 용단으로 시작된 스포츠계 미투에서 그날의 세월호가 떠오른 것은 나만의 비약일까. 우리는 뻔히 보고 있으면서 구출하지 못했다.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외려 보기만 하다가 구하지 못했다.
바로 그 시선이 열광과 환호성, 그리고 그 응답으로서의 메달을 너무나 평범한 것으로 만든다. 그 평범함 뒤에 웅크리고 있을 어둠과 불투명성은 시선의 맹점으로 습관적으로 몰아넣으며. 오직 시선이 가닿는 부분만을, 그렇게 빛나는 부분만을 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눈이 멀었다.
실상 전명규 전횡의 폭로로 나날이 드러나고 있는 바는 빙상계의 시스템이 바로 저 평범함에 기생하여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대이되, 차라리 외부의 연료를 내부의 열에너지로 전환하는 인큐베이터 같은 것이다. 무대 밖 관객은 시선과 함성을 입력하고 인큐베이터는 메달로 응답한다. 하지만 그 속내는 얼음처럼 투명하지만은 않은데, 바로 그게 이 인큐베이터의 효율성이다. 찬란한 영광이 새겨지는 외벽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암흑임에, 인큐베이터의 연출자들이 두 얼굴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그 보안은 유지되며, 빙상의 배우들이 성과를 내는 한 멈추지 않는다. 이 블랙박스 인큐베이터는 먼저 컨버터인 셈이다. 관객의 시선과 응원을 메달로, 연출자의 지배욕과 탐욕을 코칭으로, 배우의 투지와 열정은 눈물로 전환하는.
이 전환이 너무나 평범한 요구 사항이었다는 사실이 그 모든 눈물과 희생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그 모든 위선과 침묵을 메달을 위해 치르는 너무도 당연한 기회비용으로 만든다.
하얀 빙상을 질주하며, 그 코너마다 자신의 체중과 신경과 사투하며 심석희 선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승점을 통과하면 또 쏟아지는 박수와 갈채.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빙상연맹 고관대작들과 기념 촬영. 빙상의 트랙은 끝났어도, 그녀가 흘렸던 모든 땀방울이 하나하나 눈물이었음을 은폐하는 영원한 트랙이 마음에 천길만길의 심연을 찢는다.
조재범은 범인이 아닙니다. 이제껏 너무도 당연하게 존재해왔던 평범한 시스템의 평범한 일부일 뿐입니다. 범인(犯人)이 아니라 범인(凡人)입니다. 진짜 범인은 저 시스템입니다. 또 그 범인은 사형만이 답입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듯, 시스템 고쳐 쓰는 거 아닙니다. 이 시스템은 파괴만이 정답입니다. 우리가 뻔히 보면서도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눈물을 위해서라도.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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