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16 17:48
수정 : 2019.06.16 19:48
지난 세기는 분노의 시대였다. 억압하는 자에게 저항했고, 그 저항을 지속하게 하는 원천적 감정이 곧 분노였다. 그러니까 최소한 분노는 대상에 대한 감정이었다. 두렵지만 저항해야 할 대상에 대한 감정. 그러나 이번 세기를 지배하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다. 억압도 없어졌고, 억압하는 대상도 없어졌기에 분노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분노를 대신하는 것은 혐오다.
물론 혐오도 대상을 가진다. 그러나 혐오의 대상은 분노의 대상과는 너무도 다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창궐한 가장 대표적인 혐오인 여혐과 남혐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남혐에서 남자는, 또 여혐에서 여자는 분노하여 맞설 대상이 아니라 짜증나서 멸시해야 할 대상이다. 억압하여 저항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성가셔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지 더러워서 피하냐”라는 말보다 이를 잘 설명할 순 없다. 분노의 대상은 적어도 똥은 아니었다. 억압하는 자와 같은 두려움의 대상은 더러워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반대로 혐오의 대상은 똥이다. 분노의 대상과 달리 혐오의 대상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두번째 차이가 이로부터 나온다. 분노의 대상은 최소한 실재했다. 억압하는 자는 실재했다. 독재자나 독재정은 진짜로 존재했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자나 지배자도 진짜로 존재했다. 그 폭력이 진짜로 존재했고, 그 고통이 진짜로 아팠기 때문이다. 반면에 혐오의 대상은 그만치의 실재성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심지어 때로는 아예 실재하지 않는다. 혐오의 대상은 가짜뉴스나 허위정보를 곁들여서 가공되어 머릿속 상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심지어 허구적으로 존재할 때 더더욱 좋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일베에서 표상하는 김치녀를 보라. 그것은 거의 신화 속 마녀 수준의 악마성을 가지고 있다. 워마드에서 표상하는 한남을 보라. 거의 스릴러 영화 속 한니발 렉터 수준의 동물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런 사례가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례를 종의 보편성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과장과 뻥튀기의 허구성, 바로 거기에 혐오가 의존하는 과대망상증이 있다. 실제로 워마드는 여자들만의 세계를 건설하겠노라고 지금도 그 방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 중이다. 과대망상은 혐오의 어머니다. 과대망상 없이 혐오는 성립하지 않고, 혐오 없는 과대망상은 필요하지도 않다. 혐오의 대상은 상상의 적이다.
분노와 혐오는 아예 다른 패러다임이다. 분노는 최소한 타자를 전제한다. 나를 두렵게도 하고 억압하기도 하는 타자 말이다. 반면 혐오엔 그런 타자란 없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혐오는 타자보다는 자아를 먼저 전제해야 성립하고, 타자와의 관계는 자아와의 관계로 모두 환원될 수 있어야 성립한다. 한마디로 분노와 달리, 혐오는 나르시시즘의 감정이다. 우리가 혐오라는 감정에서 헌신이나 희생과 같은 개념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혐오는 적대감을 가지나, 자아를 포기하면서까지 적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혐오는 오직 자아를 상상과 과대망상 속에서라도 보존하기 위해서만 적대한다.(네티즌들은 이에 ‘행복회로’ 혹은 ‘뇌피셜’이라는 아주 적합한 용어를 부여했다.) 모든 혐오엔 나르시시즘적 ‘나’가 있다. 너는 하찮다. 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너는 더럽다. 내가 깨끗하기 때문이다. 너는 똥이다. 내가 금이기 때문이다. 너는 죽어야 한다.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혐오는 병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걸리는 병, 상상 속에서라도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다 망상 속에서 적대를 만들어내는 병. 워마드가 고유정을 롤모델로 삼는 이유다.
김곡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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