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왜 저럴까. 늘 궁금했다. ‘엄마부대’라는데 어떤 엄마들을 대표한다는 걸까. 안보주의자라면서 종전선언을 반대하고, 자유주의자라면서 자유보다는 독재를 더 찾는 건 그렇다 치자. 애국이라며 한국보다는 미국을 더 신뢰하는 건 뭘까. 그저 한-미 동맹이라고 하기엔, 단전부터 끌어올린 저 샤우팅은 한국보다는 미국을 잃을까 봐 지르는 절규로 보일진대. 급기야 “아베 수상님께 사죄드린다”니, 당최 어느 나라 엄마고, 누구의 엄마라는 걸까. 보통 극우는 자기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고집한다. 백인우월주의는 ‘화이트파워’, 이슬람 극단주의는 ‘알라후 아크바르’, 일본 극우도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타 국가와 타 민족을 배척한다. 그런데 엄마부대를 비롯한 한국의 극우엔 뭔가 기괴한 트위스트가 있다. 태극기 옆엔 항상 성조기가 있고, 심한 경우 일장기와 이스라엘기도 등장한다. 어떤 이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소녀상에 침을 뱉는다. 보통의 극우가 “우리 정체성 만세, 너네 정체성 꺼져”를 외칠 때, 한국 극우는 정반대로 “너네 정체성 만세, 우리 정체성 꺼져”를 외친다. 이 주객전도된 신념을 현실논리로 설명하려 한다면 음모론이 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이 을사늑약을 지지하는 대가로, 일제는 개신교 포교를 보장해주었다는 역사적 유비를 곁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실질적 보상이 있을 때 얘기다. 지금의 엄마부대는 일본 정부와 밀약된 것도 없고, 노골적인 친일로 얻을 후원금도 푼돈에 불과하다. 외려 보수정당도 지지를 철회하고 있으니 수지타산으로는 밑지는 장사. 저 전도된 신념은 현실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거꾸로 현실논리의 부재로 설명되며, 고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왜 저리도 현실에서 유리되었는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보수의 기본논리는 반공주의였다. ‘빨갱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집단내부를 통합·통제하는 전형적인 외부의존적 방법론이다. 먹히기도 했다. 50년 동안은. 문제는 외부의 적이 사라지기 시작한 90년대부터였다. 경제성장에 실패한 북한이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더니 설상가상 신자유주의와 자기계발 담론까지 밀려들어와 아프니깐 청춘이란다. 모두가 내면 계발에 몰두하며 외부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니, 외부의존 논리도 점점 약발을 잃어간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난다. 사실과 신념이 이격되었을 때 해법은 두 가지다. 사실에 따라 신념을 수정하거나, 신념에 따라 사실을 조작하거나. 불행히도 한국 보수는 후자의 방법을 선호해왔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그간의 신념을 보전하는 쪽을. 엄마부대는 그 극한의 사례로 보인다. 이것이 한국 극우의 특수성이다. 가상의 외부를 망상할수록 자아 역시 사이버가수 아담에 필적하는 가상적 정체성에 매몰되며, 이를 현실로 인증받기 위해 외부에 더 강력한 초자아를 욕망하게 된다. 하지만 그조차도 가상이다. ‘내 딸이 위안부로 끌려가도 용서한다’는 망상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결국 외부의존적 논리는 현실적 내용을 잃고 추상적 형식만 남아, 당장 가상의 적을 만들어주고 그 신념만 보호해준다면야, 그 빈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끼워 넣든, 히틀러를 끼워 넣든 상관없이 무차별화된다. 이번엔 아베였을 뿐이다. ‘엄마부대는 극우가 아닙니다. 그냥 극(劇)입니다. 더 큰 초자아를 망상하는 극작가, 가상의 역사를 샤우팅하는 사이버가수 아담입니다.’ 차라리 사이버엄마였으면. 보통 극우는 안보가 우선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국가적 정체성보다 가상적 정체성의 보전이 우선한다. 한국의 역사보다는 자기네 환상이 먼저다. 어떤 정치든, 망상에 기초할 때 더 큰 굴종을 욕망하게 된다. 그런 굴종엔 국적이 없다.
칼럼 |
[김곡의 똑똑똑] ‘엄마부대’는 극우가 아닙니다 |
영화감독 왜 저럴까. 늘 궁금했다. ‘엄마부대’라는데 어떤 엄마들을 대표한다는 걸까. 안보주의자라면서 종전선언을 반대하고, 자유주의자라면서 자유보다는 독재를 더 찾는 건 그렇다 치자. 애국이라며 한국보다는 미국을 더 신뢰하는 건 뭘까. 그저 한-미 동맹이라고 하기엔, 단전부터 끌어올린 저 샤우팅은 한국보다는 미국을 잃을까 봐 지르는 절규로 보일진대. 급기야 “아베 수상님께 사죄드린다”니, 당최 어느 나라 엄마고, 누구의 엄마라는 걸까. 보통 극우는 자기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고집한다. 백인우월주의는 ‘화이트파워’, 이슬람 극단주의는 ‘알라후 아크바르’, 일본 극우도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타 국가와 타 민족을 배척한다. 그런데 엄마부대를 비롯한 한국의 극우엔 뭔가 기괴한 트위스트가 있다. 태극기 옆엔 항상 성조기가 있고, 심한 경우 일장기와 이스라엘기도 등장한다. 어떤 이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소녀상에 침을 뱉는다. 보통의 극우가 “우리 정체성 만세, 너네 정체성 꺼져”를 외칠 때, 한국 극우는 정반대로 “너네 정체성 만세, 우리 정체성 꺼져”를 외친다. 이 주객전도된 신념을 현실논리로 설명하려 한다면 음모론이 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이 을사늑약을 지지하는 대가로, 일제는 개신교 포교를 보장해주었다는 역사적 유비를 곁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실질적 보상이 있을 때 얘기다. 지금의 엄마부대는 일본 정부와 밀약된 것도 없고, 노골적인 친일로 얻을 후원금도 푼돈에 불과하다. 외려 보수정당도 지지를 철회하고 있으니 수지타산으로는 밑지는 장사. 저 전도된 신념은 현실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거꾸로 현실논리의 부재로 설명되며, 고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왜 저리도 현실에서 유리되었는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보수의 기본논리는 반공주의였다. ‘빨갱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집단내부를 통합·통제하는 전형적인 외부의존적 방법론이다. 먹히기도 했다. 50년 동안은. 문제는 외부의 적이 사라지기 시작한 90년대부터였다. 경제성장에 실패한 북한이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더니 설상가상 신자유주의와 자기계발 담론까지 밀려들어와 아프니깐 청춘이란다. 모두가 내면 계발에 몰두하며 외부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니, 외부의존 논리도 점점 약발을 잃어간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난다. 사실과 신념이 이격되었을 때 해법은 두 가지다. 사실에 따라 신념을 수정하거나, 신념에 따라 사실을 조작하거나. 불행히도 한국 보수는 후자의 방법을 선호해왔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그간의 신념을 보전하는 쪽을. 엄마부대는 그 극한의 사례로 보인다. 이것이 한국 극우의 특수성이다. 가상의 외부를 망상할수록 자아 역시 사이버가수 아담에 필적하는 가상적 정체성에 매몰되며, 이를 현실로 인증받기 위해 외부에 더 강력한 초자아를 욕망하게 된다. 하지만 그조차도 가상이다. ‘내 딸이 위안부로 끌려가도 용서한다’는 망상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결국 외부의존적 논리는 현실적 내용을 잃고 추상적 형식만 남아, 당장 가상의 적을 만들어주고 그 신념만 보호해준다면야, 그 빈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끼워 넣든, 히틀러를 끼워 넣든 상관없이 무차별화된다. 이번엔 아베였을 뿐이다. ‘엄마부대는 극우가 아닙니다. 그냥 극(劇)입니다. 더 큰 초자아를 망상하는 극작가, 가상의 역사를 샤우팅하는 사이버가수 아담입니다.’ 차라리 사이버엄마였으면. 보통 극우는 안보가 우선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국가적 정체성보다 가상적 정체성의 보전이 우선한다. 한국의 역사보다는 자기네 환상이 먼저다. 어떤 정치든, 망상에 기초할 때 더 큰 굴종을 욕망하게 된다. 그런 굴종엔 국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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