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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27 18:13 수정 : 2018.09.28 09:31

‘세대론적 반성’을 조심하라. 많은 경우 그건 나르시시즘이거나, 엘리티즘이거나, 혹은 그 둘의 끔찍한 혼종이다. 세대론적 반성은 꼰대가 과거를 회상하며 보이는 자기연민이기 십상이다. 즉, 거짓 성찰이다. 진짜 반성은 세대를 들먹이지 않는다. 자신을 고백하고 참회할 따름이다.

박권일
사회비평가

나는 1976년에 태어났다. 소위 ‘엑스(X)세대’다. 오늘은 엑스세대와 1990년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마흔 줄 아저씨의 젊을 적 이야기라니, 생각만 해도 텁텁하기 짝이 없지만 지면 이름이 ‘다이내믹 도넛’임을 상기시켜 드리며 양해를 구한다. 이 칼럼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도넛’처럼 돌아 오늘 다시 ‘다이내믹’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주장을 매달 다른 소재로 떠들어왔다.

1975년생 소설가 장강명은 ‘엑스세대의 빚’(<한국일보> 2017년 3월30일치)이라는 칼럼에서 엑스세대를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촌스럽고 엄숙한 것이 지독히 싫었고, 세련됨과 자유로움을 열렬히 추구했다.” 그러나 “우리의 에너지는 주로 우리 세대의 욕망을 해결하는 데 쓰였”고, “자유와 해방의 물결은 우리가 관심을 가진 영역에서만 좁게 일었”다. 장강명은 “원어민 선생님이 있는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기 위해 허덕이는 내 또래 부모들”을 보면서 엑스세대가 “생존보다 이익을 위해 싸웠”던 세대임을 고백한다. 후회는 자못 비장하다.

“우리가 양성평등 같은 어젠다를 보다 깊고 무겁게 제기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 젊은이들이 남혐, 여혐, 군대, 출산 어쩌고보다는 나은 논의를 펼치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생활 현장의 민주화를 더 강하게 요구하고 실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넌더리 나는 야근과 회식문화는 진즉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제는 철이 든 엑스세대의 반성문에, 그 ‘정치적 올바름’에 박수 친 독자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난 그럴 수 없었다. “원어민 선생님이 있는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기 위해 허덕이는” 이가 엑스세대 중 대체 몇이나 될지, 장강명은 생각해본 적 있을까? 그런 엑스세대는 그럴듯한 대학을 나와 대도시 사무직 또는 전문직으로 일하는 중산층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영어 유치원은커녕 일반 유치원에라도 보낼 수 있으면 다행인 사람들이 엑스세대엔 더 많다. 출산도 결혼도 하지 않은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압권은 따로 있다. ‘엑스세대가 “양성평등”과 “생활 현장의 민주화”를 더 강하게 요구하고 실천하지 않았다’는 질타. 실제론 어땠는가. “양성평등”과 “생활 현장의 민주화” 요구가 1990년대처럼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지속적으로 조직된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1990년대 “영 페미니스트”라 불린 이들의 치열한 싸움이 없었다면 운동권 내 성폭력 공론화도, 호주제 폐지도, 성매매방지법과 성매매처벌법 제정도, 직장 내 성희롱 방지 교육도 불가능했거나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장강명이 “‘김영삼 정권 타도’ 따위의 게으른 구호”를 외쳤다고 이죽댄 엑스세대 운동권 일부는 아직도 현장에서 정권과 자본의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있다.

나는 엑스세대가 제일 가난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또한 엑스세대가 제일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반성을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또래의 존재를 깡그리 지우는 형태로 자신의 ‘깨어 있음’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장강명의 반성문은 천진난만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88만원 세대> 출간 직후 이른바 86세대의 반성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은 같다. ‘선의는 이해합니다만, 아이고, 의미 없네요.’ 두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특정 세대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세대가 호황기를 살아온 기성세대보다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건 경기변동이나 경제구조 등 ‘운’이 나빠서이지 어떤 세대가 다른 어떤 세대를 의도적으로 차별한 결과가 아니다. 둘째, 그런 반성들이 ‘지금 여기에서’ 불평등의 구조를 바꾸는 일로 이어지기 어렵거나 심지어 회피하는 면책부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세대 문제는 특정 세대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나 특정 세대의 윤리적 성찰 따위로는 해결될 수 없다.

‘세대론적 반성’을 조심하라. 많은 경우 그건 나르시시즘이거나, 엘리티즘이거나, 혹은 그 둘의 끔찍한 혼종이다. 세대론적 반성은 꼰대가 과거를 회상하며 보이는 자기연민이기 십상이다. 즉, 거짓 성찰이다. 진짜 반성은 세대를 들먹이지 않는다. 자신을 고백하고 참회할 따름이다. 1997년 무렵 내가 유행시키려다 실패한 구호로 글을 마무리한다. 투쟁은 투게더, 반성은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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