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평가 <기생충> 영화평에는 유독 계급(class)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이동진) “정밀한 나머지 비통한 계급의식의 조감도.”(김혜리) “더 넓게, 더 깊게. 확장의 시력으로 현 사회 계급을 탐색하는 봉테일적 시각.”(이화정) 그런데 과연 이 영화가 계급 서사일까?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계급론>에서 계급의 네가지 기본 속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계급은 관계적이다. 그 관계들은 적대적이다. 그러한 적대들은 착취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착취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기반해 있다.” 계급은 마르크스가 발명한 말이 아니지만, 마르크스 이후 계급 개념이 체계화되면서 일반적으로 계급은 ‘신분’(status)과 구별되는 범주가 됐다. 이런 속성에 비춰볼 때 <기생충>은 계급 서사가 아니다. 기택은 몰락한 중산층 룸펜이지 노동계급이 아니다. 비밀 지하방에서 살아가는 근세 역시 비슷하다. 박 사장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거의 설명되지 않으며 그냥 정보기술(IT) 업계 부호로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를 꾸려가는 기본 단위가 개인이나 계급 집단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점도 전형적 계급 서사와 거리가 멀다. 계급에 대한 이야기려면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있어야 하지만, <기생충>에는 그런 대립이 나오지 않는다. 계급의 부재와 (계급) 적대의 부재. 바로 그것이 영화 <기생충>의 핵심이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신분을 향한 선망, 혐오, 수치심이 일으키는 긴장이다. 계급의식이나 사회적 적대가 없기 때문에 극의 긴장은 약자끼리의 악다구니와 개인적·즉자적 폭력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다. 기택에게 “너는 계획이 서 있구나!”라고 칭찬받는 아들 기우는 박 사장처럼 되겠다는 꿈을 꾸지만, 영화의 결말이 냉혹하게 보여준 것처럼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박 사장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조금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겠지만 평생 ‘반지하’에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차단해버리는 이 폐쇄성이야말로 계급 사회와 신분 사회의 결정적 차이다. 요컨대 <기생충>은 ‘계급적 분노를 그린 리얼리즘’도, ‘계급 우화’도 아니다. <기생충>은 신분 사회의 혐오를 그린 가족 잔혹극이다. 칸 영화제 기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밝혔다. “반지하라는 공간은 서구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다. 더 힘들어지면 영화 속 누군가처럼 완전히 지하로 간다는 공포감이 있다.” 즉 ‘반지하’는 한국의 빈곤을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반지하’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수도권에만’ 있다. 민주정책연구원 <경제이슈분석> 2015년 11호에 따르면 ‘반지하’의 98%가 서울과 수도권에 있다. 다시 말해 비수도권-지방 사람들에게는 애초부터 빈곤의 보편적 재현공간일 수 없다. 또한 ‘반지하’보다 훨씬 열악한 주거 형태도 많기 때문에 주거 빈곤의 최말단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국토교통부, ‘주택 이외의 거처 주거실태조사’, 2018년) 봉 감독의 말과 달리 현실에서 ‘반지하’에 살다가 더 힘들어진 사람들은 지하로 가는 게 아니라 ‘지상’으로 나온다. 그들이 가는 곳은 고시원, 쪽방, 비닐하우스다. 영화 개봉 후 쏟아져 나온 ‘반지하’ 경험담과 언론의 뜨거운 관심은 가난과 불평등에 관한 담론조차 얼마나 편중적인지를 보여준 예이기도 했다. 영화가 꼭 정의를 설파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재현의 이데올로기 효과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계속 눈에 밟혔던 지점은 영화가 가난과 불평등을, 그리고 이를 재현하는 냄새를 사회 모순이 아니라 자연 재난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영화는 “계획”이 있든 없든, ‘반지하 인생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신화는 역사를 자연화(naturalization)한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은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기묘하게 변주되고 있었다. ‘냄새는 불평등을 자연화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러니까 평등 세상을 만들어야지’라며 주먹을 불끈 쥘 수도 있다. 하지만 출구 없는 현실에 절망과 무력감을 더 강하게 느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사회 현상으로서 불평등은 자연적이기는커녕 철저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이다.
칼럼 |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냄새는 불평등을 자연화한다 |
사회비평가 <기생충> 영화평에는 유독 계급(class)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이동진) “정밀한 나머지 비통한 계급의식의 조감도.”(김혜리) “더 넓게, 더 깊게. 확장의 시력으로 현 사회 계급을 탐색하는 봉테일적 시각.”(이화정) 그런데 과연 이 영화가 계급 서사일까?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계급론>에서 계급의 네가지 기본 속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계급은 관계적이다. 그 관계들은 적대적이다. 그러한 적대들은 착취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착취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기반해 있다.” 계급은 마르크스가 발명한 말이 아니지만, 마르크스 이후 계급 개념이 체계화되면서 일반적으로 계급은 ‘신분’(status)과 구별되는 범주가 됐다. 이런 속성에 비춰볼 때 <기생충>은 계급 서사가 아니다. 기택은 몰락한 중산층 룸펜이지 노동계급이 아니다. 비밀 지하방에서 살아가는 근세 역시 비슷하다. 박 사장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거의 설명되지 않으며 그냥 정보기술(IT) 업계 부호로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를 꾸려가는 기본 단위가 개인이나 계급 집단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점도 전형적 계급 서사와 거리가 멀다. 계급에 대한 이야기려면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있어야 하지만, <기생충>에는 그런 대립이 나오지 않는다. 계급의 부재와 (계급) 적대의 부재. 바로 그것이 영화 <기생충>의 핵심이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신분을 향한 선망, 혐오, 수치심이 일으키는 긴장이다. 계급의식이나 사회적 적대가 없기 때문에 극의 긴장은 약자끼리의 악다구니와 개인적·즉자적 폭력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다. 기택에게 “너는 계획이 서 있구나!”라고 칭찬받는 아들 기우는 박 사장처럼 되겠다는 꿈을 꾸지만, 영화의 결말이 냉혹하게 보여준 것처럼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박 사장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조금 어려움을 겪을 수는 있겠지만 평생 ‘반지하’에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차단해버리는 이 폐쇄성이야말로 계급 사회와 신분 사회의 결정적 차이다. 요컨대 <기생충>은 ‘계급적 분노를 그린 리얼리즘’도, ‘계급 우화’도 아니다. <기생충>은 신분 사회의 혐오를 그린 가족 잔혹극이다. 칸 영화제 기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밝혔다. “반지하라는 공간은 서구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다. 더 힘들어지면 영화 속 누군가처럼 완전히 지하로 간다는 공포감이 있다.” 즉 ‘반지하’는 한국의 빈곤을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반지하’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수도권에만’ 있다. 민주정책연구원 <경제이슈분석> 2015년 11호에 따르면 ‘반지하’의 98%가 서울과 수도권에 있다. 다시 말해 비수도권-지방 사람들에게는 애초부터 빈곤의 보편적 재현공간일 수 없다. 또한 ‘반지하’보다 훨씬 열악한 주거 형태도 많기 때문에 주거 빈곤의 최말단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국토교통부, ‘주택 이외의 거처 주거실태조사’, 2018년) 봉 감독의 말과 달리 현실에서 ‘반지하’에 살다가 더 힘들어진 사람들은 지하로 가는 게 아니라 ‘지상’으로 나온다. 그들이 가는 곳은 고시원, 쪽방, 비닐하우스다. 영화 개봉 후 쏟아져 나온 ‘반지하’ 경험담과 언론의 뜨거운 관심은 가난과 불평등에 관한 담론조차 얼마나 편중적인지를 보여준 예이기도 했다. 영화가 꼭 정의를 설파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재현의 이데올로기 효과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계속 눈에 밟혔던 지점은 영화가 가난과 불평등을, 그리고 이를 재현하는 냄새를 사회 모순이 아니라 자연 재난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영화는 “계획”이 있든 없든, ‘반지하 인생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신화는 역사를 자연화(naturalization)한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은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기묘하게 변주되고 있었다. ‘냄새는 불평등을 자연화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러니까 평등 세상을 만들어야지’라며 주먹을 불끈 쥘 수도 있다. 하지만 출구 없는 현실에 절망과 무력감을 더 강하게 느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사회 현상으로서 불평등은 자연적이기는커녕 철저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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