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제작국장 늘 임기 말엔 ‘더’와 ‘덜’의 차이일 뿐 부조리가 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상상을 뛰어넘는 진실이 보도됐다. 점점 드러난 진실은 국민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이쯤 되면 대통령 퇴진과 아울러 정치구조에 대해 되짚어봐야 한다. 대통령이 바뀐다 해서 개선될까? 더 ‘순수한’ 초인이 온다 해도 그 ‘절대반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권력의 초집중, 닫히고 갇힌 권력이 자행하는 것들이 어떤지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면 사실 ‘절대반지’를 산산이 쪼개 그 힘을 고스란히 민에게 돌려주는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 ‘초인’이 미디어의 이미지로 구축된 허상임을 뉴스로 확인하지 않는가? 이에 일극체제를 넘어선 강한 분권과 자치를 원한다. 구체적으로 ‘연방제’와 ‘읍면동자치제’다. 변방을 수탈해 권력과 자본을 집중한 서울의 횡포는 온 국토를 신음케 한다. 변방 주민은 나라의 흔들림에 더 민감하다. 보성 백남기 농민이 서울에 와 농업·농촌 근간인 쌀을 지키자 했다가 경찰 물대포를 맞아 선종하지 않았는가? 사드 반대의 성주 주민이 말하지 않는가? 제어되지 않는 권력은 선거로 됐다 해도 독재다. 순간의 투표가 모든 걸 담보할 수 없다. 더 이상 ‘대리인’이 아니라 ‘대표자’로서 휘두르는 권력의 전횡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패했다. 정치와 삶의 일치가 아니라 정당과 광장의 언어가 다르다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는 한 우리의 정치는 실패했다. 권력도 자본도 또한 저항도 투쟁도 서울로 귀결되는 이런 방식을 이젠 깨트릴 때다. 단지 ‘선수 교체’가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까지 숙의해야 한다. 투표소의 ‘일초 민주주의’가 아니라 삶에서 흐르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다. 먼저 일등표가 아니면 사표가 되는 승자독식 선거제를 ‘연동형비례대표제’로 바꿔야 한다. 양당제가 서로 나눠 먹던 것을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는 다당제로 바꿔야 한다. 정국은 어수선해야 한다. 고통받는 삶이 변치 않는데 어찌 정국이 평안할 수 있는가? 정쟁이 아니라 정책에서 다양한 정당이 다채로운 이슈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뉴스가 생생히 흘러야 한다. 그리고 다시 연방제와 읍면동 자치제이다. 연방제는 독자성을 가진 여러 지역정부가 하나의 국가를 구성해 다양성 속에서도 통합성을 보장하는 지역분권적 정치제다. 제어되는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연방제가 필요하다. 그 먼 서울 청와대로 가지 않고도 지역의 삶을 지역에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읍면동 생활세계는 이제 권력이 아닌 주민들이 공론장을 만들어 스스로 건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민의 수준이 대통령보다 낫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하지 않았는가? 국가는 무얼 하느냐? 제헌헌법 제87조의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를 지켜 삶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고, 제18조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에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를 회복해 공공성과 자본에 대한 제어를 큰 틀에서 지켜야 한다. 권력이 사라진 자리에 혼란이 오지 않고 민주주의 꽃이 피는 걸 지역에선 이미 경험하고 있다. 옥천이 그렇다. 농민들이 투쟁해 만든 농업발전위원회가 군의회의 표적조사 요구에 항거해 의장실을 점거, 대화를 요구했을 때 민주주의 꽃이 핀다는 걸 안다. 군의원도 조합장도 없는 안남면에서는 민의 공론장인 지역발전위원회로 스스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더라. 미래가 그려지고 평화가 오더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선장 없이 사공들만의 힘으로 배를 산까지 끌고 갈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선장 따위 필요없다. 세월호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선장 따위에 의존하지 말고 일하는 사공의 힘으로 우리의 정치를 시작하자. 삶의 정치, 광장의 정치, 저잣거리 정치를 바야흐로 시작할 때이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일하는 사공의 힘으로 우리의 정치를 / 황민호 |
<옥천신문> 제작국장 늘 임기 말엔 ‘더’와 ‘덜’의 차이일 뿐 부조리가 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상상을 뛰어넘는 진실이 보도됐다. 점점 드러난 진실은 국민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이쯤 되면 대통령 퇴진과 아울러 정치구조에 대해 되짚어봐야 한다. 대통령이 바뀐다 해서 개선될까? 더 ‘순수한’ 초인이 온다 해도 그 ‘절대반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권력의 초집중, 닫히고 갇힌 권력이 자행하는 것들이 어떤지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면 사실 ‘절대반지’를 산산이 쪼개 그 힘을 고스란히 민에게 돌려주는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 ‘초인’이 미디어의 이미지로 구축된 허상임을 뉴스로 확인하지 않는가? 이에 일극체제를 넘어선 강한 분권과 자치를 원한다. 구체적으로 ‘연방제’와 ‘읍면동자치제’다. 변방을 수탈해 권력과 자본을 집중한 서울의 횡포는 온 국토를 신음케 한다. 변방 주민은 나라의 흔들림에 더 민감하다. 보성 백남기 농민이 서울에 와 농업·농촌 근간인 쌀을 지키자 했다가 경찰 물대포를 맞아 선종하지 않았는가? 사드 반대의 성주 주민이 말하지 않는가? 제어되지 않는 권력은 선거로 됐다 해도 독재다. 순간의 투표가 모든 걸 담보할 수 없다. 더 이상 ‘대리인’이 아니라 ‘대표자’로서 휘두르는 권력의 전횡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패했다. 정치와 삶의 일치가 아니라 정당과 광장의 언어가 다르다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는 한 우리의 정치는 실패했다. 권력도 자본도 또한 저항도 투쟁도 서울로 귀결되는 이런 방식을 이젠 깨트릴 때다. 단지 ‘선수 교체’가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까지 숙의해야 한다. 투표소의 ‘일초 민주주의’가 아니라 삶에서 흐르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다. 먼저 일등표가 아니면 사표가 되는 승자독식 선거제를 ‘연동형비례대표제’로 바꿔야 한다. 양당제가 서로 나눠 먹던 것을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는 다당제로 바꿔야 한다. 정국은 어수선해야 한다. 고통받는 삶이 변치 않는데 어찌 정국이 평안할 수 있는가? 정쟁이 아니라 정책에서 다양한 정당이 다채로운 이슈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뉴스가 생생히 흘러야 한다. 그리고 다시 연방제와 읍면동 자치제이다. 연방제는 독자성을 가진 여러 지역정부가 하나의 국가를 구성해 다양성 속에서도 통합성을 보장하는 지역분권적 정치제다. 제어되는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연방제가 필요하다. 그 먼 서울 청와대로 가지 않고도 지역의 삶을 지역에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읍면동 생활세계는 이제 권력이 아닌 주민들이 공론장을 만들어 스스로 건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민의 수준이 대통령보다 낫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하지 않았는가? 국가는 무얼 하느냐? 제헌헌법 제87조의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를 지켜 삶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고, 제18조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에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를 회복해 공공성과 자본에 대한 제어를 큰 틀에서 지켜야 한다. 권력이 사라진 자리에 혼란이 오지 않고 민주주의 꽃이 피는 걸 지역에선 이미 경험하고 있다. 옥천이 그렇다. 농민들이 투쟁해 만든 농업발전위원회가 군의회의 표적조사 요구에 항거해 의장실을 점거, 대화를 요구했을 때 민주주의 꽃이 핀다는 걸 안다. 군의원도 조합장도 없는 안남면에서는 민의 공론장인 지역발전위원회로 스스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더라. 미래가 그려지고 평화가 오더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선장 없이 사공들만의 힘으로 배를 산까지 끌고 갈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선장 따위 필요없다. 세월호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선장 따위에 의존하지 말고 일하는 사공의 힘으로 우리의 정치를 시작하자. 삶의 정치, 광장의 정치, 저잣거리 정치를 바야흐로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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