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제작국장 광기 어린 사이비 종교 수준이었다. 해병대 군복을 입고 고성과 욕설, 완력으로 ‘육영수 여사 숭모제 규탄 기자회견’을 제지하는 걸 보고 ‘아수라’인가 싶었다. 살벌했지만 이내 연민이 느껴졌고 안타까웠다. 해마다 11월29일이면 관성회관 499석에 꽉 들어차고도 남을 사람들은 100여명으로 확 줄었다. 정말 맹목적인 추종자만 남은 셈이다. 박정희나 박근혜보다 육영수를 좋아하는 스펙트럼은 더 넓다. 암살당했다는 비극적인 죽음에 앞서 서슬퍼런 독재정권에서 단아하고 자애로운 이미지로 미디어에 그렇게 비췄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상이고 신화가 됐다. 그날 모인 옥천 사람들은 옥천 육씨 종친들이 대부분이었고, 타지에서 박근혜를 추종하는 ‘박해모’, ‘박사모’들이 주를 이루었다. 참여한 옥천 사람들에게 물으니 ‘박근혜는 잘못했지만 육영수는 잘못이 없지 않으냐’며 연좌제 운운하는 이들도 적잖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옥천 사람 중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이들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상식을 가진 주민이라면 동영상만 봐도 숭모제의 민낯과 적나라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재정권을 우상화, 신격화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살이 떨릴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추종하고 기리는 것은 얼마든지 자유일 수 있다. 하지만 공공장소를 대관하고, 공공예산을 투여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10년째 700만원의 옥천군 예산을 지원하는 ‘육영수 숭모제’를 폐지하라고 ‘박근혜 정권퇴진 옥천국민행동’은 말하고 있다. 깨어 있는 옥천 주민들이 만든 ‘옥천국민행동’에서 규정하는 육영수의 위상은 명확하다. ‘육영수란 인물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기 전에 자애로운 국모, 괴한의 총에 죽은 비운의 여주인공이란 이미지로 각인돼왔다. 이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악함을 희석시켰음은 물론 이후 그 딸인 박근혜가 국정책임자로 실력을 검증받기보단 그 어머니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덧씌워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데까지 십분 활용됐다.’ 옥천땅엔 유구한 역사 사이로 흐르는 맥과 기운이 분명히 있다. 어떤 역사를 지키고 기릴 것인가는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옥천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 수차례 전쟁이 일어 평화를 갈망하는 주민들이 무차별 희생을 당했고, 고려시대 공주 명학소 천민들의 혁명(망이-망소이의 난) 때도 같이 동조하여 봉기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조헌 선생과 함께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에 동참한 역사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에는 최시형 선생과 함께 기포령을 내리는 데 같이 힘을 보탰으며, 일제강점기엔 임시정부 시절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한 조동호 선생과 3·1만세혁명의 바탕을 만든 김규흥 선생도 있었다. 4·19혁명 당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임창순 선생도, 박정희 독재정권하에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정론직필의 정신을 잃지 않고 언론인의 사표로 남은 송건호 선생도 옥천 사람이다. 이런 역사의 정기를 이어받아 친일반민족언론인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주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도 옥천이며, 옥천 농민들은 농업과 농촌을 지키려고 서울에 올라가 숱하게 아스팔트 투쟁을 같이 해왔다. 세월호에 희생된 이들, 백남기 농민을 위해서도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행진을 했다. 그런 흐름 밖에 박정희 독재정권의 육영수가 있고 전두환 군사정권의 박준병이 있다. 독재정권의 지근거리에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거나 다른 이미지로 순치시켜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던 이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옥천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중요한 몫이기도 하다. 얼마 전 동학농민혁명의 후예였던 옥천 농민들이 트랙터를 이끌고 전봉준 투쟁단에 합류해 청와대로 진격했고 수많은 옥천 주민이 매주 수요일 저녁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을 밝히고 있다.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유념할 것인가에 따라 오늘의 삶이 바뀌고 내일의 역사가 달라진다. 옥천은 박근혜의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으로 불리길 원치 않는다. 불의한 권력에 민의 목소리로 당당히 투쟁하며 삶을 지켜왔던 그곳으로 불리길 원한다.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옥천은 육영수의 고향으로 불리길 원치 않는다 / 황민호 |
<옥천신문> 제작국장 광기 어린 사이비 종교 수준이었다. 해병대 군복을 입고 고성과 욕설, 완력으로 ‘육영수 여사 숭모제 규탄 기자회견’을 제지하는 걸 보고 ‘아수라’인가 싶었다. 살벌했지만 이내 연민이 느껴졌고 안타까웠다. 해마다 11월29일이면 관성회관 499석에 꽉 들어차고도 남을 사람들은 100여명으로 확 줄었다. 정말 맹목적인 추종자만 남은 셈이다. 박정희나 박근혜보다 육영수를 좋아하는 스펙트럼은 더 넓다. 암살당했다는 비극적인 죽음에 앞서 서슬퍼런 독재정권에서 단아하고 자애로운 이미지로 미디어에 그렇게 비췄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상이고 신화가 됐다. 그날 모인 옥천 사람들은 옥천 육씨 종친들이 대부분이었고, 타지에서 박근혜를 추종하는 ‘박해모’, ‘박사모’들이 주를 이루었다. 참여한 옥천 사람들에게 물으니 ‘박근혜는 잘못했지만 육영수는 잘못이 없지 않으냐’며 연좌제 운운하는 이들도 적잖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옥천 사람 중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이들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상식을 가진 주민이라면 동영상만 봐도 숭모제의 민낯과 적나라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재정권을 우상화, 신격화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살이 떨릴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추종하고 기리는 것은 얼마든지 자유일 수 있다. 하지만 공공장소를 대관하고, 공공예산을 투여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10년째 700만원의 옥천군 예산을 지원하는 ‘육영수 숭모제’를 폐지하라고 ‘박근혜 정권퇴진 옥천국민행동’은 말하고 있다. 깨어 있는 옥천 주민들이 만든 ‘옥천국민행동’에서 규정하는 육영수의 위상은 명확하다. ‘육영수란 인물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기 전에 자애로운 국모, 괴한의 총에 죽은 비운의 여주인공이란 이미지로 각인돼왔다. 이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악함을 희석시켰음은 물론 이후 그 딸인 박근혜가 국정책임자로 실력을 검증받기보단 그 어머니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덧씌워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데까지 십분 활용됐다.’ 옥천땅엔 유구한 역사 사이로 흐르는 맥과 기운이 분명히 있다. 어떤 역사를 지키고 기릴 것인가는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옥천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 수차례 전쟁이 일어 평화를 갈망하는 주민들이 무차별 희생을 당했고, 고려시대 공주 명학소 천민들의 혁명(망이-망소이의 난) 때도 같이 동조하여 봉기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조헌 선생과 함께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에 동참한 역사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에는 최시형 선생과 함께 기포령을 내리는 데 같이 힘을 보탰으며, 일제강점기엔 임시정부 시절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한 조동호 선생과 3·1만세혁명의 바탕을 만든 김규흥 선생도 있었다. 4·19혁명 당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임창순 선생도, 박정희 독재정권하에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정론직필의 정신을 잃지 않고 언론인의 사표로 남은 송건호 선생도 옥천 사람이다. 이런 역사의 정기를 이어받아 친일반민족언론인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주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도 옥천이며, 옥천 농민들은 농업과 농촌을 지키려고 서울에 올라가 숱하게 아스팔트 투쟁을 같이 해왔다. 세월호에 희생된 이들, 백남기 농민을 위해서도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행진을 했다. 그런 흐름 밖에 박정희 독재정권의 육영수가 있고 전두환 군사정권의 박준병이 있다. 독재정권의 지근거리에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거나 다른 이미지로 순치시켜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던 이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옥천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중요한 몫이기도 하다. 얼마 전 동학농민혁명의 후예였던 옥천 농민들이 트랙터를 이끌고 전봉준 투쟁단에 합류해 청와대로 진격했고 수많은 옥천 주민이 매주 수요일 저녁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을 밝히고 있다.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유념할 것인가에 따라 오늘의 삶이 바뀌고 내일의 역사가 달라진다. 옥천은 박근혜의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으로 불리길 원치 않는다. 불의한 권력에 민의 목소리로 당당히 투쟁하며 삶을 지켜왔던 그곳으로 불리길 원한다.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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