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위원장 40년 넘게 서울에 살다가 전남 고흥으로 이사 온 지 6년쯤 되었다. 서울에 살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점이 참 많지만 가장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지형도다. 서울에 살 때라면 말을 섞을 일도 거의 없었을, 가령 나와는 정치적 입장도, 정서도, 문화도, 주요 관심사도 매우 다른 사람들과 내가 사생활을 나눌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것. 호불호가 분명한 편인데다 친소관계에 따라 아닌 걸 맞다고는 도무지 못하는 성질머리라 평소 ‘까칠하다’ 소리깨나 듣는 편이고, 넓고 얕은 인간관계엔 피로를 몹시 쉽게 느껴서 서울에 살 때는 주로 말이 잘 통하는 소수의 사람들과만 어울려 지내던 내가 말이다. 가령 어젯밤 같은 일은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내가 생각해도 참 생경하다. 옆지기(남편)가 읍내 술친구들과 만난다고 나가더니 갑자기 나한테 전화를 했다. 누구네 집 상담이 필요한데 다들 그건 아무래도 내가 해줘야겠다고 한다며 술자리로 나오란다. 외투만 걸쳐 입고 슬리퍼를 끌고 나가보니 남정네 셋이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몇 년을 가르쳤어도 여전히 나를 ‘형수'라고 부르는 것에 예전 같으면 파르르 떨기부터 했을 내가, 그런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뒤로하고 남의 부부 갈등에 이런저런 잔소리를 해댄다. 그 와중에 내 잔소리를 듣던 친구가 잠깐 밖으로 나오라기에 무슨 얘길 나한테만 따로 하려나 싶어 따라 나갔더니 으슥한 골목길로 데려가 나에게 담배를 내민다. 불을 붙여주고 내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지켜 서서 나를 가려주고 있더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 동네에서 자기 나름은 여성흡연권을 보장해주겠다는 배려다. 만나면 일단 나이부터 ‘까고’ 남성 서열 기준으로 모든 관계에 위계가 정해지는 지역, 네 식구가 살림 좀 같이 하고 산다고 ‘남편 잘 만나 여왕 대접 받는 여자’ 소리를 들어야 하는 지역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 한숨 늘어졌던 때를 생각하면 참 격세지감이다. 내가 이렇게 나와는 아주 많이 다른 사람들과도 정들어 가고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은, 서울에 살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가끔씩 나는 내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생각한다. ‘노동중독·소비중독' 상태의 도시에서는 도무지 알지 못했던 타인의 필요에 대해서. 타인이 필요해야 겸손도 배우게 되는 거더라. 다시 말해 죽어라고 ‘돈을 벌거나 돈 주고 사는 것’ 말고, 사람이 ‘먹고 사는 일’에 대해서 도무지 뭘 아는 게 있어야 아는 척도 하고 사는 거지 늘 남의 도움을 받고 살다보니 잘난 척도 쉽지 않더란 말이다. 아무리 농촌이 예전과 달라졌느니 농사는 이제 기계가 다 짓느니 해도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 여전히 농사는 하늘에 달린 일이고 상호 의존의 공동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더라. 그것이 여전히 매우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공동체라 하더라도 말이다. 각자도생밖엔 길이 없다는 대도시에서 ‘타인의 존재’란 무엇일까? 층간 소음으로 고통을 주는 이들이 곧 이웃인 대도시에서 과연 ‘사회’란 무엇일까? 사회라는 게 있긴 할까? 언젠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인에게 했던 농담이 떠오른다. “사회가 있어야 사회주의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여전히 농촌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을 안고 살지만, 그럼에도 농촌에 살고 있는 덕분에 나는 서울에 살 때보다는 훨씬 더 자주 나에게서 선한 본성과 의지를 꺼내 쓰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묻는다. 어떤 삶의 자리에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삶의 자리를 만들어갈 것인가. *김석 순천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이 연재를 마치고 명인씨가 칼럼을 시작합니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까칠한’ 서울댁이 ‘동네 형수’로 산다는 것 / 명인(命人)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위원장 40년 넘게 서울에 살다가 전남 고흥으로 이사 온 지 6년쯤 되었다. 서울에 살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점이 참 많지만 가장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지형도다. 서울에 살 때라면 말을 섞을 일도 거의 없었을, 가령 나와는 정치적 입장도, 정서도, 문화도, 주요 관심사도 매우 다른 사람들과 내가 사생활을 나눌 정도로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것. 호불호가 분명한 편인데다 친소관계에 따라 아닌 걸 맞다고는 도무지 못하는 성질머리라 평소 ‘까칠하다’ 소리깨나 듣는 편이고, 넓고 얕은 인간관계엔 피로를 몹시 쉽게 느껴서 서울에 살 때는 주로 말이 잘 통하는 소수의 사람들과만 어울려 지내던 내가 말이다. 가령 어젯밤 같은 일은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내가 생각해도 참 생경하다. 옆지기(남편)가 읍내 술친구들과 만난다고 나가더니 갑자기 나한테 전화를 했다. 누구네 집 상담이 필요한데 다들 그건 아무래도 내가 해줘야겠다고 한다며 술자리로 나오란다. 외투만 걸쳐 입고 슬리퍼를 끌고 나가보니 남정네 셋이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몇 년을 가르쳤어도 여전히 나를 ‘형수'라고 부르는 것에 예전 같으면 파르르 떨기부터 했을 내가, 그런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뒤로하고 남의 부부 갈등에 이런저런 잔소리를 해댄다. 그 와중에 내 잔소리를 듣던 친구가 잠깐 밖으로 나오라기에 무슨 얘길 나한테만 따로 하려나 싶어 따라 나갔더니 으슥한 골목길로 데려가 나에게 담배를 내민다. 불을 붙여주고 내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지켜 서서 나를 가려주고 있더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 동네에서 자기 나름은 여성흡연권을 보장해주겠다는 배려다. 만나면 일단 나이부터 ‘까고’ 남성 서열 기준으로 모든 관계에 위계가 정해지는 지역, 네 식구가 살림 좀 같이 하고 산다고 ‘남편 잘 만나 여왕 대접 받는 여자’ 소리를 들어야 하는 지역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 한숨 늘어졌던 때를 생각하면 참 격세지감이다. 내가 이렇게 나와는 아주 많이 다른 사람들과도 정들어 가고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은, 서울에 살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가끔씩 나는 내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생각한다. ‘노동중독·소비중독' 상태의 도시에서는 도무지 알지 못했던 타인의 필요에 대해서. 타인이 필요해야 겸손도 배우게 되는 거더라. 다시 말해 죽어라고 ‘돈을 벌거나 돈 주고 사는 것’ 말고, 사람이 ‘먹고 사는 일’에 대해서 도무지 뭘 아는 게 있어야 아는 척도 하고 사는 거지 늘 남의 도움을 받고 살다보니 잘난 척도 쉽지 않더란 말이다. 아무리 농촌이 예전과 달라졌느니 농사는 이제 기계가 다 짓느니 해도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 여전히 농사는 하늘에 달린 일이고 상호 의존의 공동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더라. 그것이 여전히 매우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공동체라 하더라도 말이다. 각자도생밖엔 길이 없다는 대도시에서 ‘타인의 존재’란 무엇일까? 층간 소음으로 고통을 주는 이들이 곧 이웃인 대도시에서 과연 ‘사회’란 무엇일까? 사회라는 게 있긴 할까? 언젠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인에게 했던 농담이 떠오른다. “사회가 있어야 사회주의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여전히 농촌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을 안고 살지만, 그럼에도 농촌에 살고 있는 덕분에 나는 서울에 살 때보다는 훨씬 더 자주 나에게서 선한 본성과 의지를 꺼내 쓰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묻는다. 어떤 삶의 자리에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삶의 자리를 만들어갈 것인가. *김석 순천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이 연재를 마치고 명인씨가 칼럼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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