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시골로 이사 갔다며? 어디?” “전남 고흥.” 이 말을 한번에 알아듣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아들었대도 고흥이란 곳이 어디쯤 붙어 있는 곳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 우리 식구의 시골행을 영 마뜩잖아하셨던 내 시부는 “하필 귀양조차 안 가던 곳으로 간다”시더라. ‘지역이 중앙에게’라고 할 때, 그래서 나는 지역인가? 지난달엔 일이 있어 서울에 다녀왔다. 친구와 이른바 ‘망리단길’을 걸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동네는 떴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불편을 호소한다는데, 규모가 작고 다양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가 내 눈엔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내 기억 속의 서울은 비슷비슷한 프랜차이즈 업소들의 점령지였던 탓. “와, 서울이 진짜 많이 변했어요.” 내 말에 친구가 화들짝 놀란 듯이 말했다. “서울이 변했다구요? 제가 살고 있는 금천구는 예전과 비슷해요.” 아차, 싶더라. 망원동 길을 싸잡아 “서울이 변했다”고 말할 때의 나도 지역인가? 외지 사람들은 고흥 어디엘 와도 고흥에 간다고 말하는데, 고흥의 면 단위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자주 고흥에 간다고 말한다. 그때의 고흥은 5일마다 큰 장이 서는 군청 소재지다. 전국이 하루 생활권인데다 심지어 지구촌이라지만, 평생 살고 있는 마을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고흥도 아니고 점암면도 아니고 ‘시목’(마을 이름)에 산다. 내가 서울에 살 때, 나에게 ‘지역’이란 내 아이가 자라 혼자서 집 밖으로 나설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아이가 오가는 거리, 아이가 차조심해야 하는 도로, 아이가 군것질거리를 사는 가게들, 내 아이가 뛰노는 곳이 그제야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 그 전까진 4년을 한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말 그대로의 베드타운에 불과한 지역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었을까?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지역에 ‘살고 있는’ 건 내 아이들뿐. 먹을 것을 구하고, 먹고, 일하고, 놀고, 관계 맺고…, 말 그대로 ‘살’ 때에야 지역은 발견된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니 많은 게 달라지더라. 바쁠 땐 서로의 일손이 되고, 순번을 기다려 자기 집에 없는 농기계를 빌려 쓰고, 아랫집에서 심지 않은 아욱은 우리 것을 나눠드리고 우리 집에서 심지 않은 쪽파는 윗집 것을 얻어먹으니 어느새 나에게도 지역이란 게 생겨 있더라. 결국 지역의 발견은 ‘생활의 발견’이자 ‘이웃의 발견’이다. 소비 말고 생활, 곁을 주는 관계망의 구축이 가능해야 지역이란 말이다. 집을 짓고 있는 중이라 잠시 읍내 아파트로 이사 와 살다 보니 내 생활은 다시 달라졌다. 아랫집, 윗집, 옆집이 시골 마을에 살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지만 우리는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으로 다툴 때를 제외하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군 단위 인구는 점점 준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몇 년 사이에 고흥 읍내는 놀랍게 체감할 정도로 사람도 차도 늘었다. 이젠 농사를 지어도 읍내 아파트에 살면서 논밭으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와 함께 시골 마을엔 빈집이 늘어간다. 어찌 보면 이제 시골엔 노인들이나 부러 시골로 온 귀농자가 아닌 담에야 지역을 떠날 사람들과 떠나고 싶은 사람들만 남은 셈인지도. 그런데 같은 구에 있는 집과 직장을 오가며 텃밭 농사를 짓고, 꿀을 얻을 벌통을 놓을 곳을 찾고, 동네 도서관이며 여성발전센터며 온갖 지역 일을 간섭하며 살고 있는 내 친구는 서울시민이기보다 금천구민으로 지역에 살고 있더라. 그렇다면 누가 중앙이고, 누가 지역인가? 집이나 시설에 갇혀 살지 않고 ‘지역’에서 함께 살겠다고 휠체어를 끌고 거리로 뛰쳐나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이동권’, ‘노동권’을 외치는 장애인들은? 존재를 드러내고도 안전하게 존중받으며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고 ‘차별금지법 제정’, ‘배제 없는 인권’을 외치는 성소수자들은? 지역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발견되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지역의 발견 / 명인(命人)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시골로 이사 갔다며? 어디?” “전남 고흥.” 이 말을 한번에 알아듣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아들었대도 고흥이란 곳이 어디쯤 붙어 있는 곳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 우리 식구의 시골행을 영 마뜩잖아하셨던 내 시부는 “하필 귀양조차 안 가던 곳으로 간다”시더라. ‘지역이 중앙에게’라고 할 때, 그래서 나는 지역인가? 지난달엔 일이 있어 서울에 다녀왔다. 친구와 이른바 ‘망리단길’을 걸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동네는 떴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불편을 호소한다는데, 규모가 작고 다양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가 내 눈엔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내 기억 속의 서울은 비슷비슷한 프랜차이즈 업소들의 점령지였던 탓. “와, 서울이 진짜 많이 변했어요.” 내 말에 친구가 화들짝 놀란 듯이 말했다. “서울이 변했다구요? 제가 살고 있는 금천구는 예전과 비슷해요.” 아차, 싶더라. 망원동 길을 싸잡아 “서울이 변했다”고 말할 때의 나도 지역인가? 외지 사람들은 고흥 어디엘 와도 고흥에 간다고 말하는데, 고흥의 면 단위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자주 고흥에 간다고 말한다. 그때의 고흥은 5일마다 큰 장이 서는 군청 소재지다. 전국이 하루 생활권인데다 심지어 지구촌이라지만, 평생 살고 있는 마을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고흥도 아니고 점암면도 아니고 ‘시목’(마을 이름)에 산다. 내가 서울에 살 때, 나에게 ‘지역’이란 내 아이가 자라 혼자서 집 밖으로 나설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아이가 오가는 거리, 아이가 차조심해야 하는 도로, 아이가 군것질거리를 사는 가게들, 내 아이가 뛰노는 곳이 그제야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 그 전까진 4년을 한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말 그대로의 베드타운에 불과한 지역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었을까?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지역에 ‘살고 있는’ 건 내 아이들뿐. 먹을 것을 구하고, 먹고, 일하고, 놀고, 관계 맺고…, 말 그대로 ‘살’ 때에야 지역은 발견된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니 많은 게 달라지더라. 바쁠 땐 서로의 일손이 되고, 순번을 기다려 자기 집에 없는 농기계를 빌려 쓰고, 아랫집에서 심지 않은 아욱은 우리 것을 나눠드리고 우리 집에서 심지 않은 쪽파는 윗집 것을 얻어먹으니 어느새 나에게도 지역이란 게 생겨 있더라. 결국 지역의 발견은 ‘생활의 발견’이자 ‘이웃의 발견’이다. 소비 말고 생활, 곁을 주는 관계망의 구축이 가능해야 지역이란 말이다. 집을 짓고 있는 중이라 잠시 읍내 아파트로 이사 와 살다 보니 내 생활은 다시 달라졌다. 아랫집, 윗집, 옆집이 시골 마을에 살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지만 우리는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으로 다툴 때를 제외하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군 단위 인구는 점점 준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몇 년 사이에 고흥 읍내는 놀랍게 체감할 정도로 사람도 차도 늘었다. 이젠 농사를 지어도 읍내 아파트에 살면서 논밭으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와 함께 시골 마을엔 빈집이 늘어간다. 어찌 보면 이제 시골엔 노인들이나 부러 시골로 온 귀농자가 아닌 담에야 지역을 떠날 사람들과 떠나고 싶은 사람들만 남은 셈인지도. 그런데 같은 구에 있는 집과 직장을 오가며 텃밭 농사를 짓고, 꿀을 얻을 벌통을 놓을 곳을 찾고, 동네 도서관이며 여성발전센터며 온갖 지역 일을 간섭하며 살고 있는 내 친구는 서울시민이기보다 금천구민으로 지역에 살고 있더라. 그렇다면 누가 중앙이고, 누가 지역인가? 집이나 시설에 갇혀 살지 않고 ‘지역’에서 함께 살겠다고 휠체어를 끌고 거리로 뛰쳐나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이동권’, ‘노동권’을 외치는 장애인들은? 존재를 드러내고도 안전하게 존중받으며 이웃과 더불어 살겠다고 ‘차별금지법 제정’, ‘배제 없는 인권’을 외치는 성소수자들은? 지역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발견되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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