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최근 2·28민주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5·18민주화운동과 6·10항쟁에 이어 민주화운동으로는 다섯 번째다. 그런데 2·28민주운동이 뭐지? 낯설어하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2·28민주운동은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대구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저항운동이다. 3·15의거를 거쳐 4·19혁명의 출발점이 된 첫 민주운동이다. 나도 대구에 살기 전까지는 2·28민주운동을 알지 못했다. 대구 토박이들 가운데도 최근에야 2·28을 알았다는 이들이 꽤 많다. 오랜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지역의 지배 세력들이 굳이 저항의 역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2·28 이듬해인 1961년 시민들이 모금을 해 ‘학생의거기념탑’을 대구 명덕로터리에 세우기도 했지만, 이후 이 운동은 흑백사진 몇장만 남긴 채 묻히는 듯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에게는 오히려 감추고 싶은 역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2·28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고 지켜온 이들의 오랜 노고 덕분에 늦게나마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대구 언론들은 이 소식을 머리기사로 다루며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축하를 나눴다. 또 지금까지 묻혀 있는 관련 역사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서울 언론들은 이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기념일 지정 발표 일주일 뒤 한 신문이 ‘대구 2·28, 광주 5·18 반열 올랐다’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의미를 짚어주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짧은 소식으로 전하는 데 그쳤다. 민주화운동 관련 국가기념일 지정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 배경이 서울 아닌 지역이라는 이유로 홀대받은 것인지. ‘보수 꼴통 도시’라는 비판만 받아오다 이번 기념일 지정으로 이 지역의 민주운동 역사를 인정받았다며 뿌듯해하던 대구 사람들은 적잖게 실망했다. 항상 꾸중만 듣던 아이가 모처럼 상을 타 으쓱하다가 아무도 몰라주자 혼자 머쓱해진 느낌마저 든다. 2·28민주운동이 늦게나마 이런 지위를 얻기까지 그간의 노력에 동참해준 광주시민들의 연대가 큰 힘이 되었다. 이제부터 2·28의 의의를 제대로 알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일은 대구 사람들의 몫이다. 국가기념일 지정 뒤 첫 기념일을 앞두고 2·28이 품어온 의미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지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잠시 1960년 2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 유명한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부는 대구 공립고교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그날 대구에서 열리는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 학교에서는 임시 시험까지 치르게 했다. 이에 분노한 대구 8개고 학생들이 모여 ‘천당에서 만나자’며 시위를 결의했다. 학생들은 등교 뒤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학교를 빠져나와 거리시위를 벌였다. 관제데모에나 동원되던 학생들이 스스로 뭉쳐 독재에 항거하며 거리로 나선 것이다. 한나절 만에 학생들과 교사들이 끌려가고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독재에 항거한 첫 시위로 기록된다. 오는 28일, 당시 시위에 앞장섰던 학교의 후배들이 옛 교복을 입고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지금은 일흔을 훌쩍 넘긴, 당시 시위 참가자들도 나와 후배들과 함께 시위를 재현한다. 또 다른 고교생들은 이날 2·28기념탑이 있는 공원을 걷고, 그 걸음에 뜻을 같이하는 어른들이 후원금을 모아 베트남 학교에 전하기로 했다. 최근 들어 대구가 전국적인 주목을 끄는 뉴스에 등장할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촉구 집회같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식이 많았다. 그런 뉴스들은 살짝 잊어주고, 민주운동의 전통을 자랑하고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애쓰는 대구 사람들을 응원해주면 좋겠다. 다가오는 28일 독재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이들과 후배들이 그날처럼 함께 걸을 때 박수를 보내고, 2·28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2·28의 도시, 대구 / 박주희 |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최근 2·28민주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5·18민주화운동과 6·10항쟁에 이어 민주화운동으로는 다섯 번째다. 그런데 2·28민주운동이 뭐지? 낯설어하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2·28민주운동은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대구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저항운동이다. 3·15의거를 거쳐 4·19혁명의 출발점이 된 첫 민주운동이다. 나도 대구에 살기 전까지는 2·28민주운동을 알지 못했다. 대구 토박이들 가운데도 최근에야 2·28을 알았다는 이들이 꽤 많다. 오랜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지역의 지배 세력들이 굳이 저항의 역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2·28 이듬해인 1961년 시민들이 모금을 해 ‘학생의거기념탑’을 대구 명덕로터리에 세우기도 했지만, 이후 이 운동은 흑백사진 몇장만 남긴 채 묻히는 듯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에게는 오히려 감추고 싶은 역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2·28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고 지켜온 이들의 오랜 노고 덕분에 늦게나마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대구 언론들은 이 소식을 머리기사로 다루며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축하를 나눴다. 또 지금까지 묻혀 있는 관련 역사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서울 언론들은 이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기념일 지정 발표 일주일 뒤 한 신문이 ‘대구 2·28, 광주 5·18 반열 올랐다’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의미를 짚어주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짧은 소식으로 전하는 데 그쳤다. 민주화운동 관련 국가기념일 지정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 배경이 서울 아닌 지역이라는 이유로 홀대받은 것인지. ‘보수 꼴통 도시’라는 비판만 받아오다 이번 기념일 지정으로 이 지역의 민주운동 역사를 인정받았다며 뿌듯해하던 대구 사람들은 적잖게 실망했다. 항상 꾸중만 듣던 아이가 모처럼 상을 타 으쓱하다가 아무도 몰라주자 혼자 머쓱해진 느낌마저 든다. 2·28민주운동이 늦게나마 이런 지위를 얻기까지 그간의 노력에 동참해준 광주시민들의 연대가 큰 힘이 되었다. 이제부터 2·28의 의의를 제대로 알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일은 대구 사람들의 몫이다. 국가기념일 지정 뒤 첫 기념일을 앞두고 2·28이 품어온 의미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지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잠시 1960년 2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 유명한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부는 대구 공립고교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그날 대구에서 열리는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 학교에서는 임시 시험까지 치르게 했다. 이에 분노한 대구 8개고 학생들이 모여 ‘천당에서 만나자’며 시위를 결의했다. 학생들은 등교 뒤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학교를 빠져나와 거리시위를 벌였다. 관제데모에나 동원되던 학생들이 스스로 뭉쳐 독재에 항거하며 거리로 나선 것이다. 한나절 만에 학생들과 교사들이 끌려가고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독재에 항거한 첫 시위로 기록된다. 오는 28일, 당시 시위에 앞장섰던 학교의 후배들이 옛 교복을 입고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지금은 일흔을 훌쩍 넘긴, 당시 시위 참가자들도 나와 후배들과 함께 시위를 재현한다. 또 다른 고교생들은 이날 2·28기념탑이 있는 공원을 걷고, 그 걸음에 뜻을 같이하는 어른들이 후원금을 모아 베트남 학교에 전하기로 했다. 최근 들어 대구가 전국적인 주목을 끄는 뉴스에 등장할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 촉구 집회같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식이 많았다. 그런 뉴스들은 살짝 잊어주고, 민주운동의 전통을 자랑하고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애쓰는 대구 사람들을 응원해주면 좋겠다. 다가오는 28일 독재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이들과 후배들이 그날처럼 함께 걸을 때 박수를 보내고, 2·28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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