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그의 막말을 일일이 진지하게 곱씹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 ‘빨갱이’ 발언은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2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당 행사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민중당 당원들을 향해 “원래 창원에는 빨갱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논란이 되자 “경상도에서 반대만 하는 사람을 우리끼리 농담으로 빨갱이 같다고 한다”고 해명했다. 경상도에서 나고 살고 있지만, 빨갱이를 그런 의미로 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경상도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겪고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 아래 살아온 우리에게 ‘빨갱이’는 농담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렇겠지만, 경상도에서도 ‘뺄개이’라는 불도장은 온 가족의 삶을 짓누르는 가혹한 낙인이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나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직전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저 “6·25 때 다 그렇게 죽었지 뭐…” 하시던 어른들 말씀에 그런 줄만 알았다.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보리타작하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는 이듬해 유복자로 태어났다. 산기슭에 버려진 부패한 주검을 몰래 수습해 온 날이 할아버지의 기일이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만 당시 피해자가 서른명이 넘는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고 살아왔다. 좌우대립이 무언지도 모른 채 억울한 죽임을 당했지만, 가족들까지 ‘빨갱이’로 몰릴까 서로 숨죽여야 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때도 끝끝내 자식들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를 벌일 때도 내가 피해자 가족이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진실규명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빨갱이’는 가족 안에서조차 쉬쉬해야 하는, 그처럼 두려운 낙인이다. 그 두려움은 대물림되었다. 아이가 대여섯 살 때 어린이 세계백과사전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북쪽을 인식하게 되었다. 책에서 본 대로 아이는 북한을 꼬박꼬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렀다. 북한의 공식 명칭인데도 왠지 거북해서 그냥 북한이라고 부르라고 고쳐주곤 했다. 책을 보고 인공기를 따라 그리려고 할 때는 정색을 하고 말렸다. 왜 북한 국기는 그리면 안 되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남북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 안의 선명한 ‘레드 콤플렉스’에 스스로 놀랐다. 아이가 스케치북에 인공기를 그리는데도 무심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이 불편함의 원형은 형제를 적으로 두고 살아온 세월이 남긴 비극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빨갱이는 사전에서 이르듯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명료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그처럼 간단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빨갱이’라고 말한 이들에게 각각 유죄를 선고한 우리 법원 판례들이 있다.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추상적 판단”이라고 이유를 명시했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범죄에 해당한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 ‘빨갱이’라는 낙인이 얼마나 많은 가족의 삶을 파괴했으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의 앞길을 막았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일상적인 자기검열을 강요했는지. 너무 잘 아는 그와 그들은 ‘빨갱이’를 십분 활용해서 정치적 생명을 연장해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필요할 때마다 색깔을 덧입히더니 이제는 정치적 기반인 경상도를 들먹이며 욕보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색깔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으니 국민이 우습게 보이고, 그래도 몰표를 주겠거니 믿으니 경상도가 만만한 모양이다. 영화 <강철비>가 남긴 대사가 맴돈다. “분단국가의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경상도에선 빨갱이가 농담이라고? / 박주희 |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그의 막말을 일일이 진지하게 곱씹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 ‘빨갱이’ 발언은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2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당 행사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민중당 당원들을 향해 “원래 창원에는 빨갱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논란이 되자 “경상도에서 반대만 하는 사람을 우리끼리 농담으로 빨갱이 같다고 한다”고 해명했다. 경상도에서 나고 살고 있지만, 빨갱이를 그런 의미로 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경상도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겪고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 아래 살아온 우리에게 ‘빨갱이’는 농담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렇겠지만, 경상도에서도 ‘뺄개이’라는 불도장은 온 가족의 삶을 짓누르는 가혹한 낙인이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나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직전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저 “6·25 때 다 그렇게 죽었지 뭐…” 하시던 어른들 말씀에 그런 줄만 알았다.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보리타작하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는 이듬해 유복자로 태어났다. 산기슭에 버려진 부패한 주검을 몰래 수습해 온 날이 할아버지의 기일이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만 당시 피해자가 서른명이 넘는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고 살아왔다. 좌우대립이 무언지도 모른 채 억울한 죽임을 당했지만, 가족들까지 ‘빨갱이’로 몰릴까 서로 숨죽여야 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때도 끝끝내 자식들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를 벌일 때도 내가 피해자 가족이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진실규명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빨갱이’는 가족 안에서조차 쉬쉬해야 하는, 그처럼 두려운 낙인이다. 그 두려움은 대물림되었다. 아이가 대여섯 살 때 어린이 세계백과사전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북쪽을 인식하게 되었다. 책에서 본 대로 아이는 북한을 꼬박꼬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렀다. 북한의 공식 명칭인데도 왠지 거북해서 그냥 북한이라고 부르라고 고쳐주곤 했다. 책을 보고 인공기를 따라 그리려고 할 때는 정색을 하고 말렸다. 왜 북한 국기는 그리면 안 되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남북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 안의 선명한 ‘레드 콤플렉스’에 스스로 놀랐다. 아이가 스케치북에 인공기를 그리는데도 무심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이 불편함의 원형은 형제를 적으로 두고 살아온 세월이 남긴 비극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빨갱이는 사전에서 이르듯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명료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그처럼 간단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빨갱이’라고 말한 이들에게 각각 유죄를 선고한 우리 법원 판례들이 있다.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추상적 판단”이라고 이유를 명시했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범죄에 해당한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 ‘빨갱이’라는 낙인이 얼마나 많은 가족의 삶을 파괴했으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의 앞길을 막았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일상적인 자기검열을 강요했는지. 너무 잘 아는 그와 그들은 ‘빨갱이’를 십분 활용해서 정치적 생명을 연장해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필요할 때마다 색깔을 덧입히더니 이제는 정치적 기반인 경상도를 들먹이며 욕보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색깔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으니 국민이 우습게 보이고, 그래도 몰표를 주겠거니 믿으니 경상도가 만만한 모양이다. 영화 <강철비>가 남긴 대사가 맴돈다. “분단국가의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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