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두 어른이 소천하셨다. 6·13 지방선거가 끝나고 서로 네 탓이니 책임을 묻는 사이 먼저 김수업 어른이 가셨고 이어 박노정 어른이 가셨다. 어떤 이는 지역의 큰 별이 졌다고 통탄했고, 어떤 이는 지역의 보물을 잃었다고 애통해했다. 보수 텃밭이라 불리는 진주 지역에서 여야 정당과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불의 앞에서 제 목소리 내고 앞장서는 의로운 어른들이었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분들이라 생전에는 일 외의 인터뷰 요청에는 손사래만 치셨다. 가신 뒤에나마 자랑하고픈 우리 지역 어른들이다. 김수업 선생은 널리 알려진 대로 평생 ‘배달말’과 ‘배달말꽃’을 가르쳤다. 우리말을 써서 우리 얼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육자로, 국어학자로 살아온 분이다,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퇴임 이후에도 ㈔전국국어교사모임을 이끌었으며, 우리말교육연구소장, 우리말교육대학원장,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 등을 맡아 힘을 쏟았다. 무엇보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소멸되거나 왜곡된 지역문화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선생이 주도한 ㈔진주문화연구소는 지역문화의 체계적 정리와 발굴을 통해, 지난 20여년 동안 기획 총서 <진주문화를 찾아서>를 펴냈고, 진주오광대 탈춤과 솟대쟁이놀이를 복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해마다 열리는 ‘진주탈춤 한마당’은 아시아권 국가와 민속예술 교류를 하며 21회를 맞았다. 선생이 마지막까지 애쓴 일은 현재 진주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유물들이 쏟아지는 진주성 주변에 대형 주차장을 조성하고 공원화하는 것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역사진주시민모임을 꾸려 앞장서서 활동했다. 김수업 선생은 지난 6월25일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칠암성당 묘지에 묻혔다. 명성과 공덕에 비해 초라하고 험한 자리였다. 외길이라 한 사람씩 줄을 이어 올라가야 했고, 수십 기의 묘소들 위로 웃자란 풀들이 뒤덮고 있었다. “생전에 신자들을 독려해 조성한 성당 묘지인데, 신자들보고 먼저 정하라 하고 본인은 맨 마지막 남는 거 하겠다 했대요. 나중에 보니 제일 안 좋은 세 곳이 남았더래요. 이 중 한 곳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또 한 곳은 선생 자리로 정하신 거래요.” 고인의 유지였다. ‘내 죽어도 어떤 요란한 짓도 하지 마라’고도 당부하셨다. 애통함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박노정 선생이 떠났다. 박 선생은 언론인으로 시민운동가로 시인으로 살아온 분이다. 1990년 <진주신문> 창간에 함께하며 이후 12년 동안 편집·발행인으로 애썼고, 풀뿌리 지역언론 운동에 앞장섰다. 지역언론이 토호와 결탁할 때 선생은 어떤 금권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지역이 잘 되려면 먼저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고 했으며 지역사회에 건강한 여론 조성과 감시자 역할을 하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의 발상지가 진주임을 널리 알렸고, ‘진주정신’을 찾고자 애썼다. 선생이 남긴 유명한 일화는 진주성 의기사 ‘논개 영정’이 친일 화가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을 때였다. 2005년 영정 철거 과정에 벌어진 일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벌금 받을 일이 아니다”라며 노역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박노정 선생은 스스로가 못난 사람이라 내세울 게 없다며 평소에는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으나 부당하거나 부조리한 일에는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스스로는 가난하여 가진 것 없으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생전 선생의 벗이었던 홍창신씨는 선생을 가리켜 ‘헛도는 세상을 참섭느라 돈 안 되는 궂은 자리엔 감초처럼 빠지지 않던 벗’이라 했다. 선생은 지난 7월7일 산청군 차황면 가족묘지 배롱나무 아래 묻혔다. 지역에는, 서울·수도권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수많은 ‘김수업과 박노정’이 있다.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지역문화와 정신을 지켜나가는 이들이다. 일찍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삶터가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역에서 변화를 꿈꾸는 ‘조용한 혁명가’들이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두 어른, 김수업과 박노정 / 권영란 |
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두 어른이 소천하셨다. 6·13 지방선거가 끝나고 서로 네 탓이니 책임을 묻는 사이 먼저 김수업 어른이 가셨고 이어 박노정 어른이 가셨다. 어떤 이는 지역의 큰 별이 졌다고 통탄했고, 어떤 이는 지역의 보물을 잃었다고 애통해했다. 보수 텃밭이라 불리는 진주 지역에서 여야 정당과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불의 앞에서 제 목소리 내고 앞장서는 의로운 어른들이었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분들이라 생전에는 일 외의 인터뷰 요청에는 손사래만 치셨다. 가신 뒤에나마 자랑하고픈 우리 지역 어른들이다. 김수업 선생은 널리 알려진 대로 평생 ‘배달말’과 ‘배달말꽃’을 가르쳤다. 우리말을 써서 우리 얼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육자로, 국어학자로 살아온 분이다,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퇴임 이후에도 ㈔전국국어교사모임을 이끌었으며, 우리말교육연구소장, 우리말교육대학원장,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 등을 맡아 힘을 쏟았다. 무엇보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소멸되거나 왜곡된 지역문화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선생이 주도한 ㈔진주문화연구소는 지역문화의 체계적 정리와 발굴을 통해, 지난 20여년 동안 기획 총서 <진주문화를 찾아서>를 펴냈고, 진주오광대 탈춤과 솟대쟁이놀이를 복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해마다 열리는 ‘진주탈춤 한마당’은 아시아권 국가와 민속예술 교류를 하며 21회를 맞았다. 선생이 마지막까지 애쓴 일은 현재 진주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유물들이 쏟아지는 진주성 주변에 대형 주차장을 조성하고 공원화하는 것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역사진주시민모임을 꾸려 앞장서서 활동했다. 김수업 선생은 지난 6월25일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칠암성당 묘지에 묻혔다. 명성과 공덕에 비해 초라하고 험한 자리였다. 외길이라 한 사람씩 줄을 이어 올라가야 했고, 수십 기의 묘소들 위로 웃자란 풀들이 뒤덮고 있었다. “생전에 신자들을 독려해 조성한 성당 묘지인데, 신자들보고 먼저 정하라 하고 본인은 맨 마지막 남는 거 하겠다 했대요. 나중에 보니 제일 안 좋은 세 곳이 남았더래요. 이 중 한 곳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또 한 곳은 선생 자리로 정하신 거래요.” 고인의 유지였다. ‘내 죽어도 어떤 요란한 짓도 하지 마라’고도 당부하셨다. 애통함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박노정 선생이 떠났다. 박 선생은 언론인으로 시민운동가로 시인으로 살아온 분이다. 1990년 <진주신문> 창간에 함께하며 이후 12년 동안 편집·발행인으로 애썼고, 풀뿌리 지역언론 운동에 앞장섰다. 지역언론이 토호와 결탁할 때 선생은 어떤 금권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지역이 잘 되려면 먼저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고 했으며 지역사회에 건강한 여론 조성과 감시자 역할을 하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의 발상지가 진주임을 널리 알렸고, ‘진주정신’을 찾고자 애썼다. 선생이 남긴 유명한 일화는 진주성 의기사 ‘논개 영정’이 친일 화가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을 때였다. 2005년 영정 철거 과정에 벌어진 일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벌금 받을 일이 아니다”라며 노역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박노정 선생은 스스로가 못난 사람이라 내세울 게 없다며 평소에는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으나 부당하거나 부조리한 일에는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스스로는 가난하여 가진 것 없으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생전 선생의 벗이었던 홍창신씨는 선생을 가리켜 ‘헛도는 세상을 참섭느라 돈 안 되는 궂은 자리엔 감초처럼 빠지지 않던 벗’이라 했다. 선생은 지난 7월7일 산청군 차황면 가족묘지 배롱나무 아래 묻혔다. 지역에는, 서울·수도권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수많은 ‘김수업과 박노정’이 있다.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지역문화와 정신을 지켜나가는 이들이다. 일찍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삶터가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역에서 변화를 꿈꾸는 ‘조용한 혁명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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