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내가 살던 마을은 특정 시간대엔 한시간에 한번 읍내 가는 버스가 섰다. 마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시골 마을엔 하루에 대여섯번쯤 버스가 선다. 그러니 우리 마을은 역세권이라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런데도 약속 시간에 맞춰 나다니긴 어려웠다. 게다가 읍내보다 가까운 이웃 마을에 갈 때가 더 문제. 우리 마을에서 연결되는 버스 노선이 아예 없어서 대중교통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다. 그러니 당연히 자가용 승용차로 이동할 수밖에. 게다가 부부가 언제나 같이 다니는 것이 아니니 집집마다 자가용은 기본이 두대, 움직이는 식구가 많으면 식구마다 차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고흥에 온 지 얼마 안 돼 자전거를 샀다. 시골의 불편한 대중교통을 대신할 생활수단으로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는 딱 한번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다시는 안 탄다. 우선, 시골 사람들의 운전이 꽤 느리고 여유로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거친 편이다. 차가 많지 않으니 과속이 많고 주행 중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게 없다 보니 오히려 뭔가 거치적거리면 참기 힘들어한다. 게다가 지방도엔 자전거도로는 고사하고 인도도 따로 없다. 자전거가 가르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외출했다 돌아오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찬물이라도 끼얹듯 뒤에서는 연신 빵빵거리지, 쌩하고 나를 추월해가는 차는 위협적이지, 기껏 고개를 넘으니 나온 국도는 고속도로인 양 차량 속도가 높아져서 도무지 끼어들 엄두가 나질 않더라니. 생활자전거라는 건 자존심도 목숨도 내놓고 타야 하는 거더라. 나는 아직 2G폰을 쓰고 있다. 고장 나서 애프터서비스(AS)센터에 갔더니 수리 노동자가 ‘2G폰 쓰실 연센 아닌 것 같은데?’ 하더니 고치는 비용이면 바꾸라고 하더라만, 나는 내가 쓰고 있는 휴대전화의 수명이 다할 때까진 쓰고 싶고 또 아직 스마트폰이 꼭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다. 웬만한 일은 컴퓨터로도 다 할 수 있고, 평소 컴퓨터에 잡혀 있는 시간만도 너무 많다고 느끼는데 굳이 노안을 부릅뜨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급히 해결해야 할 일 따위는 오히려 없길 바란달까. 그런데 얼마 전엔 컴퓨터로 고속버스 표를 예매했다 낭패를 보았다. 예전에는 ‘문자 발권’이라는 게 있어서 휴대전화만 있으면 표를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이젠 ‘모바일 발권’이라 하여 스마트폰만 발권이 가능하게 해놓은 것이다. 터치로 링크를 눌러 인터넷에 닿을 수 없는 내 휴대전화에서는 이제 표를 확인할 방법이 없더라. 기차든 고속버스든 마찬가지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스마트폰은 문자도 받을 수 있으니 문자 발권을 하면 어떤 휴대전화를 쓰든 발권 확인을 할 수 있는데 대체 왜 스마트폰만 발권이 가능하도록 바꿔놓았을까? 이런 일은 점점 늘어만 간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스마트폰을 살까 싶어지지만, 낭패스러운 순간을 넘기고 나면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필요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필요하게 만들어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더 비싼 요금을 내고 쓰라는 건데, 결국 거기에 굴복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분하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런 걸 일컬어 ‘근원적 독점’이라 했다. ‘근원적 독점’이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충족하는 비산업적 활동을 삶에서 축출해버린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내 필요를 내가 결정할 수 없고, 나는 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할 모든 능력을 빼앗겼단 얘기다. 길은 자동차가 독점하여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 어려워졌고, 통신은 스마트폰이 독점하여 다른 수단은 쓸모없어진 것처럼. 정말이지 나는 묻고 싶다. 승용차로 빨리 이동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시간이 더 많아졌나? 스마트폰으로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어서 사람들 사이엔 소통이 더 많아졌나? 자동차와 스마트폰으로 줄인 시간에,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이 속도만큼, 정말로 우리는 행복해졌나?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행복은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타고 온다? / 명인(命人)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내가 살던 마을은 특정 시간대엔 한시간에 한번 읍내 가는 버스가 섰다. 마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시골 마을엔 하루에 대여섯번쯤 버스가 선다. 그러니 우리 마을은 역세권이라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런데도 약속 시간에 맞춰 나다니긴 어려웠다. 게다가 읍내보다 가까운 이웃 마을에 갈 때가 더 문제. 우리 마을에서 연결되는 버스 노선이 아예 없어서 대중교통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다. 그러니 당연히 자가용 승용차로 이동할 수밖에. 게다가 부부가 언제나 같이 다니는 것이 아니니 집집마다 자가용은 기본이 두대, 움직이는 식구가 많으면 식구마다 차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고흥에 온 지 얼마 안 돼 자전거를 샀다. 시골의 불편한 대중교통을 대신할 생활수단으로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는 딱 한번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다시는 안 탄다. 우선, 시골 사람들의 운전이 꽤 느리고 여유로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거친 편이다. 차가 많지 않으니 과속이 많고 주행 중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게 없다 보니 오히려 뭔가 거치적거리면 참기 힘들어한다. 게다가 지방도엔 자전거도로는 고사하고 인도도 따로 없다. 자전거가 가르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외출했다 돌아오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찬물이라도 끼얹듯 뒤에서는 연신 빵빵거리지, 쌩하고 나를 추월해가는 차는 위협적이지, 기껏 고개를 넘으니 나온 국도는 고속도로인 양 차량 속도가 높아져서 도무지 끼어들 엄두가 나질 않더라니. 생활자전거라는 건 자존심도 목숨도 내놓고 타야 하는 거더라. 나는 아직 2G폰을 쓰고 있다. 고장 나서 애프터서비스(AS)센터에 갔더니 수리 노동자가 ‘2G폰 쓰실 연센 아닌 것 같은데?’ 하더니 고치는 비용이면 바꾸라고 하더라만, 나는 내가 쓰고 있는 휴대전화의 수명이 다할 때까진 쓰고 싶고 또 아직 스마트폰이 꼭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다. 웬만한 일은 컴퓨터로도 다 할 수 있고, 평소 컴퓨터에 잡혀 있는 시간만도 너무 많다고 느끼는데 굳이 노안을 부릅뜨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급히 해결해야 할 일 따위는 오히려 없길 바란달까. 그런데 얼마 전엔 컴퓨터로 고속버스 표를 예매했다 낭패를 보았다. 예전에는 ‘문자 발권’이라는 게 있어서 휴대전화만 있으면 표를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이젠 ‘모바일 발권’이라 하여 스마트폰만 발권이 가능하게 해놓은 것이다. 터치로 링크를 눌러 인터넷에 닿을 수 없는 내 휴대전화에서는 이제 표를 확인할 방법이 없더라. 기차든 고속버스든 마찬가지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스마트폰은 문자도 받을 수 있으니 문자 발권을 하면 어떤 휴대전화를 쓰든 발권 확인을 할 수 있는데 대체 왜 스마트폰만 발권이 가능하도록 바꿔놓았을까? 이런 일은 점점 늘어만 간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스마트폰을 살까 싶어지지만, 낭패스러운 순간을 넘기고 나면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필요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필요하게 만들어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더 비싼 요금을 내고 쓰라는 건데, 결국 거기에 굴복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분하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런 걸 일컬어 ‘근원적 독점’이라 했다. ‘근원적 독점’이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충족하는 비산업적 활동을 삶에서 축출해버린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내 필요를 내가 결정할 수 없고, 나는 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할 모든 능력을 빼앗겼단 얘기다. 길은 자동차가 독점하여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 어려워졌고, 통신은 스마트폰이 독점하여 다른 수단은 쓸모없어진 것처럼. 정말이지 나는 묻고 싶다. 승용차로 빨리 이동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시간이 더 많아졌나? 스마트폰으로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어서 사람들 사이엔 소통이 더 많아졌나? 자동차와 스마트폰으로 줄인 시간에,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이 속도만큼, 정말로 우리는 행복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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