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이 세계에서 사실상 우리 눈에 보이는 노동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서비스노동을 제외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노동을 ‘상품’이나 사물로만 만나고 그것이 우리 손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을 거쳤는지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를 고 황현산 선생은 ‘간접화의 세계’라 일컬었고, 가수 루시드 폴은 ‘사람이었네’라고 노래했다. 그렇지만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나마 ‘임금’이라는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365일, 휴일도 퇴근도 없이 일하고도 그 대가를 받긴커녕 ‘집에서 논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부엌에선 숙련된 조리사이고, 때론 청소부이며, 기타 가사도우미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보모이며, 때론 아이들의 교사이며, 때론 누군가를 위한 간병인이면서, 회계와 경영을 도맡아 하기도 하는 주부가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은 여성운동의 의제가 된 적은 있어도 노동운동의 의제가 되어본 적이 없다. 청소년들은 대부분 학교에 갇힌 채 짧게는 하루 8시간에서 많게는 12시간 이상 학습노동을 한다. 그 시간 중에 학생들은 학습노동만이 아니라 자기가 쓰는 교실은 물론 교무실, 교장실 등 온 학교를 청소하기도 하고 어떤 학교에선 운동장의 잡초를 뽑기도 하며 심지어 교사들이 먹거나 가져갈 감자나 고구마를 심기도 한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강제되는 이러한 노동으로 청소년들은 장시간의 임금노동을 감내할 수 있는 몸과 비인간적인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는 정신을 그 대가로 받는다. 팔 수 있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시대에 성적 서비스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단지 구출되어야 할 존재가 되거나 낙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 의무고용 제도가 있거나 말거나 기업들은 장애인 고용보다 벌금을 택하고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이 최우선인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아주 쉽게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내 옆지기(남편)는 농사와 채취로 우리 가족이 먹을 것을 생산하고 아들과 함께 우리가 살 집을 손수 짓고 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해도 두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백수’다. 노동력을 비싸게 팔자는 운동도 아니고 ‘제발 일 좀 하게 해달라’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시대에 이러한 노동은 팔자 좋은 사람의 유희쯤으로 손쉽게 치부된다. 대체 왜, 분명히 누군가가 쉼 없이 하고 있고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이 노동들은 무임금에 노동조차 아니게 되었을까? ‘임금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굴러갈 수가 없다. 그러나 임금노동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낳아야 하고 길러야 하고 돌봐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적절한 수급과 착취를 위해서 여성 자궁의 통제를 비롯하여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 노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필요다. 아이들은 학교에 갇혀서 위계화된 적절한 노동력으로 길러져야 하고 장애인들은 그 위계에조차 들지 못한다. 또 이러한 통제는 ‘비장애인-성인-이성애자-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제도와 성별화된 노동구조에 기초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체제는 우리에게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빼앗아 우리를 소비하는 존재로 만들고서야 가능해졌다.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도 함부로 착취하면서. 이러한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을 말하고 선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의 가치를 다시 질문하고, 정상성에 도전하며, 생산과 노동의 개념을 전복하고 전환하겠단다. 그 첫걸음으로 10월27일 오후 세 시, ‘제1회 세계여/성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단다. 왜 내가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거나 대가가 없는지, 지금까지 하던 대로 싸우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지, 답답한 누구라도 청계광장으로 나가 자기 목소리를 내도 좋겠다. 변방 중의 변방의 목소리일 것이나 이 목소리들이 없이는 이 세계가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보이지 않는 노동을 말하다 / 명인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이 세계에서 사실상 우리 눈에 보이는 노동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서비스노동을 제외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노동을 ‘상품’이나 사물로만 만나고 그것이 우리 손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을 거쳤는지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를 고 황현산 선생은 ‘간접화의 세계’라 일컬었고, 가수 루시드 폴은 ‘사람이었네’라고 노래했다. 그렇지만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나마 ‘임금’이라는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365일, 휴일도 퇴근도 없이 일하고도 그 대가를 받긴커녕 ‘집에서 논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부엌에선 숙련된 조리사이고, 때론 청소부이며, 기타 가사도우미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보모이며, 때론 아이들의 교사이며, 때론 누군가를 위한 간병인이면서, 회계와 경영을 도맡아 하기도 하는 주부가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은 여성운동의 의제가 된 적은 있어도 노동운동의 의제가 되어본 적이 없다. 청소년들은 대부분 학교에 갇힌 채 짧게는 하루 8시간에서 많게는 12시간 이상 학습노동을 한다. 그 시간 중에 학생들은 학습노동만이 아니라 자기가 쓰는 교실은 물론 교무실, 교장실 등 온 학교를 청소하기도 하고 어떤 학교에선 운동장의 잡초를 뽑기도 하며 심지어 교사들이 먹거나 가져갈 감자나 고구마를 심기도 한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강제되는 이러한 노동으로 청소년들은 장시간의 임금노동을 감내할 수 있는 몸과 비인간적인 노동조건과 노동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는 정신을 그 대가로 받는다. 팔 수 있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시대에 성적 서비스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자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단지 구출되어야 할 존재가 되거나 낙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 의무고용 제도가 있거나 말거나 기업들은 장애인 고용보다 벌금을 택하고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이 최우선인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아주 쉽게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내 옆지기(남편)는 농사와 채취로 우리 가족이 먹을 것을 생산하고 아들과 함께 우리가 살 집을 손수 짓고 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해도 두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백수’다. 노동력을 비싸게 팔자는 운동도 아니고 ‘제발 일 좀 하게 해달라’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시대에 이러한 노동은 팔자 좋은 사람의 유희쯤으로 손쉽게 치부된다. 대체 왜, 분명히 누군가가 쉼 없이 하고 있고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이 노동들은 무임금에 노동조차 아니게 되었을까? ‘임금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굴러갈 수가 없다. 그러나 임금노동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낳아야 하고 길러야 하고 돌봐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적절한 수급과 착취를 위해서 여성 자궁의 통제를 비롯하여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 노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필요다. 아이들은 학교에 갇혀서 위계화된 적절한 노동력으로 길러져야 하고 장애인들은 그 위계에조차 들지 못한다. 또 이러한 통제는 ‘비장애인-성인-이성애자-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제도와 성별화된 노동구조에 기초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체제는 우리에게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빼앗아 우리를 소비하는 존재로 만들고서야 가능해졌다.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도 함부로 착취하면서. 이러한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을 말하고 선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의 가치를 다시 질문하고, 정상성에 도전하며, 생산과 노동의 개념을 전복하고 전환하겠단다. 그 첫걸음으로 10월27일 오후 세 시, ‘제1회 세계여/성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단다. 왜 내가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거나 대가가 없는지, 지금까지 하던 대로 싸우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지, 답답한 누구라도 청계광장으로 나가 자기 목소리를 내도 좋겠다. 변방 중의 변방의 목소리일 것이나 이 목소리들이 없이는 이 세계가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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