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올해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누군가는 아침부터 오들오들 떨면서 어느 고사장 정문 앞에서 자식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이날 하루로 인생이 결정될지도 모른다. 수시가 어떠니, 정시가 어떠니, 학종이 어떠니, 시시때때로 입시정책은 널을 뛰고 그럴 때마다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마음을 졸이며 당황하고 사교육 시장도 덩달아 출렁거린다. 하지만 교육정책이라 하면 기껏해야 입시정책이나 떠올릴 수 있는 이 나라에서 나는 입시정책이 어떻게 바뀌든 이 나라 청소년들의 현실이 조금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저명한 인사들이 정책의 변화를 떠들어대도, 나는 그저 조삼모사인 것만 같다. 전국에 있는 고등학교 중 어느 지역의, 몇 학교의 교실에서, 그중 몇 명이나 이러한 입시정책의 변화에 엄청난 영향을 받을까?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두어번 시험을 치르고 나면 이미 학업에 무기력해지고 몸과 영혼이 분리된 채 교실에서 자포자기를 먼저 배우는 학생들에게 입시정책의 변화가 무슨 대수일까? 오지선다의 정답 속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하는 수능이나, 꿈을 꿀 시간도 준 적이 없으면서 꿈이 뭐냐고 윽박지르는 학종이나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얼마나 다를까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입시정책엔 애초에 들어 있지 않은 청소년도 많다. 특성화고 학생들, 탈학교 학생들, 다시 말해 70%의 또래 청소년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시대에 30%에 속하는 청소년들 말이다. 특성화고등학교에 노동인권 수업을 하러 가면, 가끔씩 담당 교사가 외부 강사들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있다. “오늘 수업하기 힘드실 겁니다. 전남의 꼴통들만 모아놓은 학교인 거 아시죠?” 이러한 인권 침해에 흔히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은 노동인권 수업을 재미있게 해보자고 애를 쓰는 강사들에게 이렇게 자조하기도 한다. “쌤, 너무 애쓰지 마세요. 애초에 꿈도 희망도 없는 학교예요.” 그러나 노동인권 수업은 대개 그 학교 담당 교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된다. 얼마 전 전남의 한 특성화고 노동인권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 것 같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교도소, 학교, 공장.’ 뜻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정답을 알려주길 유보하고 혹시 여러분이 말한 이 세곳의 공통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어지는 학생들의 거침없는 대답에 내가 더 놀랐다. ‘첫째, 사람들이 갇혀 있다. 둘째, 강제노동을 한다. 셋째, 계급이 있다. 넷째, 권력관계가 있다.’ 학생들에게 ‘학습’은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갇혀서 온갖 규율 속에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장시간의 강제노동이었다. 나는 또 물었다. 계급과 권력관계가 어떻게 다른 거냐고. 학생들 간에도 넘을 수 없는 ‘가정환경’의 차이와 ‘성적’ 차이가 계급이요, 교사와 학생 간에 또 선도부 등의 기타 권력이 있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간에 있는 것이 권력관계란다. 나는 이걸 이렇게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학생들이 참 놀라웠다. 그리고 학생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의 경험이 학교 밖의 사회에서 그리고 자기가 가게 될 노동 현장에서 어떻게 이어지게 될지. 이 나라 교육에 대체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던 나에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자기들이 놓인 현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이 학생들이, 차라리 희망으로 보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정문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Arbeit Macht Frei) 의역하면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뜻이다.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에 끌려와서 아침마다 그 정문을 통과하여 강제노동을 하러 나가던 수감자들에게 과연 노동은 ‘자유’였을까? 가까스로 대학입시의 관문을 통과한다고 해도 얻을 것은 바로 이 자유다. 이 자유를 위해 청소년들은 오늘도 학교 안팎에서 신음하는데 이 나라의 교육정책은, 이 문구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백년지대계? / 명인(命人)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올해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누군가는 아침부터 오들오들 떨면서 어느 고사장 정문 앞에서 자식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이날 하루로 인생이 결정될지도 모른다. 수시가 어떠니, 정시가 어떠니, 학종이 어떠니, 시시때때로 입시정책은 널을 뛰고 그럴 때마다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마음을 졸이며 당황하고 사교육 시장도 덩달아 출렁거린다. 하지만 교육정책이라 하면 기껏해야 입시정책이나 떠올릴 수 있는 이 나라에서 나는 입시정책이 어떻게 바뀌든 이 나라 청소년들의 현실이 조금도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저명한 인사들이 정책의 변화를 떠들어대도, 나는 그저 조삼모사인 것만 같다. 전국에 있는 고등학교 중 어느 지역의, 몇 학교의 교실에서, 그중 몇 명이나 이러한 입시정책의 변화에 엄청난 영향을 받을까?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두어번 시험을 치르고 나면 이미 학업에 무기력해지고 몸과 영혼이 분리된 채 교실에서 자포자기를 먼저 배우는 학생들에게 입시정책의 변화가 무슨 대수일까? 오지선다의 정답 속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하는 수능이나, 꿈을 꿀 시간도 준 적이 없으면서 꿈이 뭐냐고 윽박지르는 학종이나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얼마나 다를까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입시정책엔 애초에 들어 있지 않은 청소년도 많다. 특성화고 학생들, 탈학교 학생들, 다시 말해 70%의 또래 청소년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시대에 30%에 속하는 청소년들 말이다. 특성화고등학교에 노동인권 수업을 하러 가면, 가끔씩 담당 교사가 외부 강사들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있다. “오늘 수업하기 힘드실 겁니다. 전남의 꼴통들만 모아놓은 학교인 거 아시죠?” 이러한 인권 침해에 흔히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은 노동인권 수업을 재미있게 해보자고 애를 쓰는 강사들에게 이렇게 자조하기도 한다. “쌤, 너무 애쓰지 마세요. 애초에 꿈도 희망도 없는 학교예요.” 그러나 노동인권 수업은 대개 그 학교 담당 교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된다. 얼마 전 전남의 한 특성화고 노동인권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 것 같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교도소, 학교, 공장.’ 뜻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정답을 알려주길 유보하고 혹시 여러분이 말한 이 세곳의 공통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어지는 학생들의 거침없는 대답에 내가 더 놀랐다. ‘첫째, 사람들이 갇혀 있다. 둘째, 강제노동을 한다. 셋째, 계급이 있다. 넷째, 권력관계가 있다.’ 학생들에게 ‘학습’은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갇혀서 온갖 규율 속에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장시간의 강제노동이었다. 나는 또 물었다. 계급과 권력관계가 어떻게 다른 거냐고. 학생들 간에도 넘을 수 없는 ‘가정환경’의 차이와 ‘성적’ 차이가 계급이요, 교사와 학생 간에 또 선도부 등의 기타 권력이 있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간에 있는 것이 권력관계란다. 나는 이걸 이렇게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학생들이 참 놀라웠다. 그리고 학생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의 경험이 학교 밖의 사회에서 그리고 자기가 가게 될 노동 현장에서 어떻게 이어지게 될지. 이 나라 교육에 대체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던 나에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자기들이 놓인 현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이 학생들이, 차라리 희망으로 보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정문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Arbeit Macht Frei) 의역하면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뜻이다.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에 끌려와서 아침마다 그 정문을 통과하여 강제노동을 하러 나가던 수감자들에게 과연 노동은 ‘자유’였을까? 가까스로 대학입시의 관문을 통과한다고 해도 얻을 것은 바로 이 자유다. 이 자유를 위해 청소년들은 오늘도 학교 안팎에서 신음하는데 이 나라의 교육정책은, 이 문구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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