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나는 내가 꽤나 똘똘한 줄만 알고 살았다. 적어도 시골에 살러 오기 전까진 말이다. 그런데…. 고흥으로 이사 온 첫 봄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 핀 꽃도 아는 이름이 하나 없다. 틈날 때마다 마을 어른들께 일일이 이름을 여쭙고 나서도 갸우뚱한 것투성이였다. 산수유라면 ‘붉은 알알’이 선명한 심상으로 떠오르는 김종길의 ‘성탄제’ 같은 시나 떠올릴 줄 알았으니 내 상상 속의 산수유는 꽃마저도 붉었나 보다. 마당이 다 환해지는 그 꽃의 노란 빛깔에 나는 당황했다. 노래로 즐겨 부르던 꽃다지가 시골 사람들에게 흔히 밟히는 그 꽃인 줄도 몰랐다. 그나마 이름을 들어본 꽃들조차 그 모양이었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꽃들도 천지더라. 꽃이 그 지경인데 나무나 풀은 오죽할까. 흔히 먹던 냉이조차 밭에 있는 건 냉이인 줄 모르겠더라. 마트에서 손질해서 팔던 냉이랑은 너무나 다르게 생겼으니까. 우리 텃밭에 작물을 심어 싹이 나도 뭐가 작물의 싹이고 뭐가 풀인지 몰라 김을 못 맸다. 봄이 되면 현관문만 열고 나가도 먹을 것이 지천이고, 산에라도 오르면 온 산에 먹을 것이 천지라는데 나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시골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절로 얻을 수 있는 것들 중 내가 아는 건 도무지 없으니 문득문득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날마다 배워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느 해 봄이던가, 지인들과 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 그런데 참 이상하더라. 같이 갔던 지인들 중 토박이 고흥 사람이야 그 산에 모르는 게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해도 나처럼 뒤늦은 나이에 귀농을 한 사람인데도 묻지도 않고 잘만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찾아내는 거다. 나는 식물도감에 나물도감까지 봐가며 찾아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잘 아는 걸까? 알고 보니 그런 사람들은 몽땅 시골 출신이었다. 대개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고향을 떠났지만 그보다 어려서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 도시에서 자란 내가 그 사람들과 다른 건 당연한 일인데도 스멀스멀 열등감이 올라왔다. 대도시, 그것도 서울에서 자란 내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에 비해 더 누린 것들도 물론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나에게 결핍된 것들과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만이 가진 자산, 혹은 능력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을 이제라도 시골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고흥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나는 무척 안타깝다. 시골에서 자라도 자연 속에서 뛰놀고 그 자연이 주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아이들에게 꽃 이름을 물어보면 대부분의 고흥 아이들이 내가 고흥에 처음 왔을 때 수준이다. 고흥에서 태어나고 고흥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만큼도 고흥말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도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도 누리지 못하고, 시골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도 누리지 못하고 자라는 셈. 그렇게 자라서 이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평생을 임금노예로 살아가겠다는 꿈(?)을 위해 경쟁력 없는 경쟁에 내몰리고, 도시에 가야만 누릴 수 있다는 문화적 욕구는 알고 보면 대개 ‘소비’에 대한 욕구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은 학업 성적이 좋은 몇몇 아이들을 위해서만 펼쳐진다. 꽤 큰돈을 쏟아붓는 무슨무슨 아카데미, 무슨무슨 캠프가 다 그런 식이다. 툭하면 인구가 줄어서 걱정이라고 떠들어대면서 결과적으로 지자체는 이 지역을 떠날 아이들만 지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에서 뛰놀고 마을에서 함께 일하면서 놀이와 노동과 배움이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교육을 꿈꿀 수는 없는 걸까? 주입식 교육 틈틈이 일회적인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지역에서 더불어 사는 것이 교육이면 안 되는 걸까?
칼럼 |
[지역이 중앙에게] 시골 사람의 특권 / 명인(命人)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나는 내가 꽤나 똘똘한 줄만 알고 살았다. 적어도 시골에 살러 오기 전까진 말이다. 그런데…. 고흥으로 이사 온 첫 봄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 핀 꽃도 아는 이름이 하나 없다. 틈날 때마다 마을 어른들께 일일이 이름을 여쭙고 나서도 갸우뚱한 것투성이였다. 산수유라면 ‘붉은 알알’이 선명한 심상으로 떠오르는 김종길의 ‘성탄제’ 같은 시나 떠올릴 줄 알았으니 내 상상 속의 산수유는 꽃마저도 붉었나 보다. 마당이 다 환해지는 그 꽃의 노란 빛깔에 나는 당황했다. 노래로 즐겨 부르던 꽃다지가 시골 사람들에게 흔히 밟히는 그 꽃인 줄도 몰랐다. 그나마 이름을 들어본 꽃들조차 그 모양이었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꽃들도 천지더라. 꽃이 그 지경인데 나무나 풀은 오죽할까. 흔히 먹던 냉이조차 밭에 있는 건 냉이인 줄 모르겠더라. 마트에서 손질해서 팔던 냉이랑은 너무나 다르게 생겼으니까. 우리 텃밭에 작물을 심어 싹이 나도 뭐가 작물의 싹이고 뭐가 풀인지 몰라 김을 못 맸다. 봄이 되면 현관문만 열고 나가도 먹을 것이 지천이고, 산에라도 오르면 온 산에 먹을 것이 천지라는데 나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시골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절로 얻을 수 있는 것들 중 내가 아는 건 도무지 없으니 문득문득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날마다 배워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느 해 봄이던가, 지인들과 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 그런데 참 이상하더라. 같이 갔던 지인들 중 토박이 고흥 사람이야 그 산에 모르는 게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해도 나처럼 뒤늦은 나이에 귀농을 한 사람인데도 묻지도 않고 잘만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찾아내는 거다. 나는 식물도감에 나물도감까지 봐가며 찾아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잘 아는 걸까? 알고 보니 그런 사람들은 몽땅 시골 출신이었다. 대개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고향을 떠났지만 그보다 어려서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 도시에서 자란 내가 그 사람들과 다른 건 당연한 일인데도 스멀스멀 열등감이 올라왔다. 대도시, 그것도 서울에서 자란 내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에 비해 더 누린 것들도 물론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나에게 결핍된 것들과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만이 가진 자산, 혹은 능력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을 이제라도 시골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고흥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나는 무척 안타깝다. 시골에서 자라도 자연 속에서 뛰놀고 그 자연이 주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아이들에게 꽃 이름을 물어보면 대부분의 고흥 아이들이 내가 고흥에 처음 왔을 때 수준이다. 고흥에서 태어나고 고흥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만큼도 고흥말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도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도 누리지 못하고, 시골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도 누리지 못하고 자라는 셈. 그렇게 자라서 이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평생을 임금노예로 살아가겠다는 꿈(?)을 위해 경쟁력 없는 경쟁에 내몰리고, 도시에 가야만 누릴 수 있다는 문화적 욕구는 알고 보면 대개 ‘소비’에 대한 욕구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은 학업 성적이 좋은 몇몇 아이들을 위해서만 펼쳐진다. 꽤 큰돈을 쏟아붓는 무슨무슨 아카데미, 무슨무슨 캠프가 다 그런 식이다. 툭하면 인구가 줄어서 걱정이라고 떠들어대면서 결과적으로 지자체는 이 지역을 떠날 아이들만 지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에서 뛰놀고 마을에서 함께 일하면서 놀이와 노동과 배움이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교육을 꿈꿀 수는 없는 걸까? 주입식 교육 틈틈이 일회적인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지역에서 더불어 사는 것이 교육이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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