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1. 촉석루가 불탔고 진주성 성곽이 무너졌다. 시청도 경찰서도 시가지도 내리 폭격을 맞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남 진주의 상황이다. 그해 7월 말부터 9월 사이 도시는 폐허가 됐다. 그해 7월30일 ‘진주 사수’를 외치던 진주시장과 경찰서장은 시민들 몰래 진주를 빠져나갔다. 인민군이 진주 북쪽과 서쪽에서 밀려들어오자 소방서 직원, 신문사 기자들까지 다 빠져나간 뒤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시민들이 피란을 가려 했으나 당시 남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인 진주교는 군경에 의해 통행이 금지돼 있었다. 거기에다 국군은 후퇴하면서 인민군의 남쪽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진주교를 폭파했던 것이다. 7월31일 인민군은 진주에 들어왔고 진주성 촉석루에 지휘소를 두었다. 미군은 B-29 편대로 네이팜탄과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고, 기총 사격을 가했다. 여기저기서 시민들도 죽어나갔다. 진주 수복을 위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었다. 9월이 되자 미군기가 소이탄을 투하했고 촉석루가 전소됐다. 촉석루는 건립된 지 600여년으로 영남 제일의 누각이라 했고 당시 국보 제278호로 지정받은 지 갓 2년이었다. 9월25일 미군과 국군은 폐허가 된 진주를 수복할 수 있었다. 진주가 ‘천년 도시’라지만 예스럽지 않은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건축물들이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새것이다. 당시 철거 대상이 된 건물은 800여동에 이르렀고, 폭격으로 반파되어 복구 대상이 된 건물만도 2천여동에 이르렀다. 진주교는 대동공업 직원을 동원해 가교를 설치하여 임시통행하게 했다가 그 뒤 두어차례 새로 건설됐다. 진주 시가지는 토지구획정리에 따라 도로가 넓어지고 재건됐다. 촉석루는 1960년 복원했고, 이 때문에 국보가 아닌 경남문화재자료로 하락했다. 시가지 복구사업은 그 뒤 10여년이 걸렸다. 지역 역사와 문화는 단절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컸다. #2. “손을 묶고 무릎을 꿇차가꼬 나래비를 세워 고마 뒤에서 총을 다쿠데.”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용산고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민간인 학살 가해자는 국군과 경찰이었다. 1950년 7월 말 명석면 우수리 갓골, 관지리 화령골짜기 등 이 일대 여섯곳에서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바다 무덤’이라 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괭이바다. 마산형무소에 예비 검속된 1681명은 대부분이 한밤중에 오랏줄에 묶여 이곳 바다에서 수장당했다. 창원 지역에서는 괭이바다 외에도 진전면 여양리, 현동 골짜기, 두척동, 성주사 골짜기, 감천골, 덕천골짜기, 신리마을 저수지 뒤편 등 일곱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대학살 사건’으로 ‘빨갱이 사냥’이라고도 했다. 그해 인민군 점령이 늦은 지역일수록 민간인 학살 피해는 컸다. 경상남도는 거창 함양 산청 진주 하동 남해 고성 마산 진해 거제 등 전 지역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지난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 당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전쟁범죄다.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법적·정치적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69년이 흘렀지만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유해들이 전국 곳곳에 방치돼 있다. 경남 지역만 하더라도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거나 발굴 및 조사가 진행되다가 중단된 곳도 있다. 거기에다 안치소가 없어 발굴한 유해마저도 여기저기 임시로 안치해놓기도 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공권력에 의한 죽음임을 인정해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도 진실화해위원회를 부활시켜 진상규명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 등 관련 7개 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 자유한국당이 거부하고 있어 논의조차 못 하고 있다. 학살 희생자 유족들은 ‘과거사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경남에서는 창원유족회, 진주유족회를 비롯해 산청·거창·함양 유족회에서 법안 제정을 촉구하며 유족들과 관련자들이 살아 있을 때 역사를 바로잡자고 호소하고 있다.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 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칼럼 |
[지역에서] 서울이 모르는 한국전쟁 / 권영란 |
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1. 촉석루가 불탔고 진주성 성곽이 무너졌다. 시청도 경찰서도 시가지도 내리 폭격을 맞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남 진주의 상황이다. 그해 7월 말부터 9월 사이 도시는 폐허가 됐다. 그해 7월30일 ‘진주 사수’를 외치던 진주시장과 경찰서장은 시민들 몰래 진주를 빠져나갔다. 인민군이 진주 북쪽과 서쪽에서 밀려들어오자 소방서 직원, 신문사 기자들까지 다 빠져나간 뒤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시민들이 피란을 가려 했으나 당시 남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인 진주교는 군경에 의해 통행이 금지돼 있었다. 거기에다 국군은 후퇴하면서 인민군의 남쪽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진주교를 폭파했던 것이다. 7월31일 인민군은 진주에 들어왔고 진주성 촉석루에 지휘소를 두었다. 미군은 B-29 편대로 네이팜탄과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고, 기총 사격을 가했다. 여기저기서 시민들도 죽어나갔다. 진주 수복을 위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었다. 9월이 되자 미군기가 소이탄을 투하했고 촉석루가 전소됐다. 촉석루는 건립된 지 600여년으로 영남 제일의 누각이라 했고 당시 국보 제278호로 지정받은 지 갓 2년이었다. 9월25일 미군과 국군은 폐허가 된 진주를 수복할 수 있었다. 진주가 ‘천년 도시’라지만 예스럽지 않은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건축물들이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새것이다. 당시 철거 대상이 된 건물은 800여동에 이르렀고, 폭격으로 반파되어 복구 대상이 된 건물만도 2천여동에 이르렀다. 진주교는 대동공업 직원을 동원해 가교를 설치하여 임시통행하게 했다가 그 뒤 두어차례 새로 건설됐다. 진주 시가지는 토지구획정리에 따라 도로가 넓어지고 재건됐다. 촉석루는 1960년 복원했고, 이 때문에 국보가 아닌 경남문화재자료로 하락했다. 시가지 복구사업은 그 뒤 10여년이 걸렸다. 지역 역사와 문화는 단절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컸다. #2. “손을 묶고 무릎을 꿇차가꼬 나래비를 세워 고마 뒤에서 총을 다쿠데.”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용산고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민간인 학살 가해자는 국군과 경찰이었다. 1950년 7월 말 명석면 우수리 갓골, 관지리 화령골짜기 등 이 일대 여섯곳에서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바다 무덤’이라 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괭이바다. 마산형무소에 예비 검속된 1681명은 대부분이 한밤중에 오랏줄에 묶여 이곳 바다에서 수장당했다. 창원 지역에서는 괭이바다 외에도 진전면 여양리, 현동 골짜기, 두척동, 성주사 골짜기, 감천골, 덕천골짜기, 신리마을 저수지 뒤편 등 일곱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민간인 대학살 사건’으로 ‘빨갱이 사냥’이라고도 했다. 그해 인민군 점령이 늦은 지역일수록 민간인 학살 피해는 컸다. 경상남도는 거창 함양 산청 진주 하동 남해 고성 마산 진해 거제 등 전 지역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지난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 당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전쟁범죄다.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법적·정치적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69년이 흘렀지만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유해들이 전국 곳곳에 방치돼 있다. 경남 지역만 하더라도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거나 발굴 및 조사가 진행되다가 중단된 곳도 있다. 거기에다 안치소가 없어 발굴한 유해마저도 여기저기 임시로 안치해놓기도 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공권력에 의한 죽음임을 인정해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도 진실화해위원회를 부활시켜 진상규명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 등 관련 7개 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 자유한국당이 거부하고 있어 논의조차 못 하고 있다. 학살 희생자 유족들은 ‘과거사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경남에서는 창원유족회, 진주유족회를 비롯해 산청·거창·함양 유족회에서 법안 제정을 촉구하며 유족들과 관련자들이 살아 있을 때 역사를 바로잡자고 호소하고 있다.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 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