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3년 전 캄보디아 한 시골 마을에서 박문진씨를 처음 봤다. 그의 동료가 맡긴 작은 꾸러미를 전해주러 만났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웃는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아이들과 장난치고, 아이의 상처 난 팔꿈치에 약을 발라주는 모습이 흡사 동네 큰이모였다. 그는 당시 1년 예정으로 그곳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마와 옷 한벌을 전해달라고 했던 이는 송영숙씨다. 그 두 사람이 지금 70m 고공에 같이 올라가 있다. 지난 1일 새벽 대구 영남대의료원 14층 건물 옥상에 올랐고, 16일째 거기 있다. 부당해고에 맞선 13년 싸움의 마침표를 찍겠다는 각오로 싸우는 중이다. 영남대의료원 간호사이던 두 사람은 2007년 해고됐다. 당시 노조는 주5일제 시행에 맞춰 인력충원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단체협약 이행을 요구하며 사흘간 부분파업을 벌였다. 이를 빌미로 노조 간부 10명이 해고됐고, 무더기 징계와 손해배상청구도 이어졌다. 그사이 950명이던 조합원은 70여명으로 줄었다. 한참 뒤에 밝혀졌지만 악명 높은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된 결과다. 대법원 판결로 7명은 복직됐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3명은 아직도 해고 상태다. 이후 복직을 위한 싸움은 처절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삭발, 단식, 108배, 삼보일배…. 2012년 대선 기간에는 영남학원 이사이자 실질적 주인 행세를 하는 박근혜 후보를 따라다니며 ‘그림자 투쟁’을 했다. 두 사람이 서울에서 지하방을 얻어 살면서 삼성동 후보 집 앞에서 매일 3000배를 하며 복직을 요구했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3000배를 자그마치 57일 동안 해도 소용없었다. 모진 시간을 버텼고 촛불이 정부를 바꿨지만, 이들은 여전히 해고노동자다. 창조컨설팅을 통한 조직적 노조파괴와 파업유도가 사실로 드러나도 그 파업에 앞장선 이들을 해고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박씨는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살려고 간호사가 됐다. 조산사 자격증까지 갖추고 2년만 병원 분만실에서 경험을 쌓아 떠나자며 영남대의료원에 들어갔다. 나이팅게일을 꿈꾸던 그에게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사람 살리는 병원이 돈 중심으로 움직이다보니 ‘나이팅게일’보다는 돈 버는 데 협조적인 ‘직원’이 우대받았다. 그가 영남대의료원노조와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민주노총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돈보다 생명’이 먼저인 병원을 만드는 데 앞장선 이유다. 그동안 노조가 주장해온 의료민주화는 상당 부분 현실이 되었다. 무상의료가 확대됐고, 부당한 특진비가 없어졌다. 보호자 없는 병실도 늘었다. 이제는 당연한 듯 누리는 환자들의 권리는 두 간호사와 같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오랜 싸움으로 이뤄낸 성과다. 입원실 보호자 침대와 냉장고 설치, 티브이 무료 시청, 밤 시간과 주말 무료 주차, 수술 대기실 전광판 설치와 같은 세세한 것들까지. 두 사람 모두 한뎃잠이야 이골이 났지만, 고공 생활은 녹록지 않다. 텐트를 치고 비닐을 덮었다고는 하나 땡볕과 비바람을 막기에는 어림도 없다. 천막을 둘러 화장실 흉내만 겨우 내놨다. 밑에서 동지들이 올려다주는 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물이 없으니 이 여름에 씻지 못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그래도 ‘텐트하우스 전망이 최고’라며 걱정하는 이들을 안심시킨다. 오랜 세월 꿈쩍도 않던 영남대의료원 쪽은 최근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고 있다. 이들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는 길은 하나라는 걸 사측은 잘 알고 있다. 그동안은 외면했을 뿐이다. 예순을 바라보는 박씨는 당장 복직을 해도 정년까지 2년 남았다. 더 미룰 수 없었다. 고공투쟁을 시작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고 유서를 썼다. 함께 사는 여든다섯 어머니에게는 이전처럼 캄보디아로 의료봉사를 떠난다고 둘러댔다. ‘더운 나라에 가는데 겨울옷은 왜 챙기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줄 사람이 있어 그런다’며 속울음을 삼켰다. 올려다보기도 까마득한 고공에 선 그들과 통화를 했다. 말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거듭했지만, 의지만은 또렷하게 전해졌다. “살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복직해야지요.” 70m 벼랑 끝에 박문진, 송영숙 두 간호사가 있다.
칼럼 |
[지역에서] 70m 벼랑 끝에 선 간호사들 / 박주희 |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3년 전 캄보디아 한 시골 마을에서 박문진씨를 처음 봤다. 그의 동료가 맡긴 작은 꾸러미를 전해주러 만났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웃는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아이들과 장난치고, 아이의 상처 난 팔꿈치에 약을 발라주는 모습이 흡사 동네 큰이모였다. 그는 당시 1년 예정으로 그곳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마와 옷 한벌을 전해달라고 했던 이는 송영숙씨다. 그 두 사람이 지금 70m 고공에 같이 올라가 있다. 지난 1일 새벽 대구 영남대의료원 14층 건물 옥상에 올랐고, 16일째 거기 있다. 부당해고에 맞선 13년 싸움의 마침표를 찍겠다는 각오로 싸우는 중이다. 영남대의료원 간호사이던 두 사람은 2007년 해고됐다. 당시 노조는 주5일제 시행에 맞춰 인력충원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단체협약 이행을 요구하며 사흘간 부분파업을 벌였다. 이를 빌미로 노조 간부 10명이 해고됐고, 무더기 징계와 손해배상청구도 이어졌다. 그사이 950명이던 조합원은 70여명으로 줄었다. 한참 뒤에 밝혀졌지만 악명 높은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된 결과다. 대법원 판결로 7명은 복직됐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3명은 아직도 해고 상태다. 이후 복직을 위한 싸움은 처절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삭발, 단식, 108배, 삼보일배…. 2012년 대선 기간에는 영남학원 이사이자 실질적 주인 행세를 하는 박근혜 후보를 따라다니며 ‘그림자 투쟁’을 했다. 두 사람이 서울에서 지하방을 얻어 살면서 삼성동 후보 집 앞에서 매일 3000배를 하며 복직을 요구했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3000배를 자그마치 57일 동안 해도 소용없었다. 모진 시간을 버텼고 촛불이 정부를 바꿨지만, 이들은 여전히 해고노동자다. 창조컨설팅을 통한 조직적 노조파괴와 파업유도가 사실로 드러나도 그 파업에 앞장선 이들을 해고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박씨는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살려고 간호사가 됐다. 조산사 자격증까지 갖추고 2년만 병원 분만실에서 경험을 쌓아 떠나자며 영남대의료원에 들어갔다. 나이팅게일을 꿈꾸던 그에게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사람 살리는 병원이 돈 중심으로 움직이다보니 ‘나이팅게일’보다는 돈 버는 데 협조적인 ‘직원’이 우대받았다. 그가 영남대의료원노조와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민주노총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돈보다 생명’이 먼저인 병원을 만드는 데 앞장선 이유다. 그동안 노조가 주장해온 의료민주화는 상당 부분 현실이 되었다. 무상의료가 확대됐고, 부당한 특진비가 없어졌다. 보호자 없는 병실도 늘었다. 이제는 당연한 듯 누리는 환자들의 권리는 두 간호사와 같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오랜 싸움으로 이뤄낸 성과다. 입원실 보호자 침대와 냉장고 설치, 티브이 무료 시청, 밤 시간과 주말 무료 주차, 수술 대기실 전광판 설치와 같은 세세한 것들까지. 두 사람 모두 한뎃잠이야 이골이 났지만, 고공 생활은 녹록지 않다. 텐트를 치고 비닐을 덮었다고는 하나 땡볕과 비바람을 막기에는 어림도 없다. 천막을 둘러 화장실 흉내만 겨우 내놨다. 밑에서 동지들이 올려다주는 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물이 없으니 이 여름에 씻지 못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그래도 ‘텐트하우스 전망이 최고’라며 걱정하는 이들을 안심시킨다. 오랜 세월 꿈쩍도 않던 영남대의료원 쪽은 최근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고 있다. 이들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는 길은 하나라는 걸 사측은 잘 알고 있다. 그동안은 외면했을 뿐이다. 예순을 바라보는 박씨는 당장 복직을 해도 정년까지 2년 남았다. 더 미룰 수 없었다. 고공투쟁을 시작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고 유서를 썼다. 함께 사는 여든다섯 어머니에게는 이전처럼 캄보디아로 의료봉사를 떠난다고 둘러댔다. ‘더운 나라에 가는데 겨울옷은 왜 챙기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줄 사람이 있어 그런다’며 속울음을 삼켰다. 올려다보기도 까마득한 고공에 선 그들과 통화를 했다. 말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거듭했지만, 의지만은 또렷하게 전해졌다. “살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복직해야지요.” 70m 벼랑 끝에 박문진, 송영숙 두 간호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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