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 문제로 온 세상이 시끄럽다. 그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별문제가 아니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극심한 박탈감 느끼는 사람들조차도 딴 세상인, 이것은 언제 김용균처럼 죽을지 모르는 무수한 김용균들의 이야기다. 전남의 모 특성화고에 얼마 전 노동인권 수업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1교시. 교실엔 단 두명의 학생이 앉아 있었다. 출석부에 적힌 인원은 26명.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학생들에게 어렵사리 말을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9시20분쯤 되자 뒷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명이 들어왔다. 9시 반쯤 또 한명. 특성화고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모둠을 만들어 나까지 다섯명이 둘러앉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뭘 하려는 의욕을 보이는 학생은 없었다. 내가 활동지를 나누어주고 같이 토론하여 적어보자고 했을 때 볼펜이 없어서 못 한다는 학생들. 내가 뭘 하든 상관없이 학생들은 자기 볼일을 보고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하는 학생도 있었다. 강사에게는 매우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지난 5년간의 특성화고 수업을 통해 나는 배웠다. 존중은 존중받아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 학교의 통제와 경쟁의 논리가 내면화된 정도에 따라 학생들의 무례와 수업 분위기는 학교마다 다르지만, 무기력과 좌절감이 둥둥 떠다니는 교실에서 존중받아본 경험 따위는 거의 없는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점은 전남의 어느 특성화고엘 가도 마찬가지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질문을 하면 매번 한명쯤은 장난을 걸어왔다. 가령 이런 식, 성서에 나오는 인물과 이름이 같은 학생에게 “이름이 독특하네요. 기독교 집안인가요?”라고 내가 물었을 때 다른 학생들이 키득거리며 “쟤네 집 교회 무지 열심히 다니는데요. 그 교회 이단이에요.” 나 역시 학생들의 어떤 말도 무시하거나 흘려버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어느 순간쯤 학생들은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단’이라는 단어를 잡아챘다. “아, 이단. 기독교계의 ‘아싸’란 얘기군요. 그럼 우리, 기독교 말고 그냥 ‘아싸’들의 노동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제가 보기엔 여러분도 이 사회에선 ‘아싸’ 같은데 저도 그렇거든요. 근데 저는 이 사회에서 내가 ‘아싸’라는 데 약간은 자부심이 있어요.” 그즈음부터 학생들은 고개를 들었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 같다. 하나같이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어코 땅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 대규모화와 관행농이라 불리는 화학농들 사이에서 고집스레 유기 농사를 짓는 사람들, 대도시의 현란함과 편리를 버리고 시골에 와서 소박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 직장에서 해고되어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바쁜데 ‘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라며 싸움을 선택한 사람들, 어떻게든 내 새끼만은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새끼만 잘사는 세상은 소용없다며 마을 학교를 만들고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가르쳐보겠다는 사람들 등등. 다시 말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선택한,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들의 이야기 말이다. 이쯤에서 학생들의 눈빛은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그날의 수업을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 이야기로 마쳤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남을 짓밟고 기둥을 오르던 애벌레가 어느날 경쟁을 포기하고 내려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자기에게서 실을 뽑아 고치를 짓고 결국 나비가 되는 이야기. 수업이 끝날 무렵 한 학생이 물었다. “쌤, 쌤 같은 생각을 하는 어른이 많나요?” 나는 대답했다. “비율로 따진다면 아주 소수겠지만, 아마도 학생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많을 거예요.” 학생들의 표정도 확연히 밝아졌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모처럼 떠오른 이 진지한 눈빛과 밝은 표정을 제도교육이 끝내 지켜줄 수 있을까 가슴이 저렸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를 읽고 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왜 결국 나비가 되는 ‘애벌레’가 아니라 ‘꽃들’에게 희망을, 일까? 전남에서 특성화고 학생들을 만나면서 나는 어쩌면 그 대답을 알 것도 같다.
칼럼 |
[지역에서] 꽃들에게 희망을 / 명인(命人) |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 문제로 온 세상이 시끄럽다. 그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별문제가 아니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극심한 박탈감 느끼는 사람들조차도 딴 세상인, 이것은 언제 김용균처럼 죽을지 모르는 무수한 김용균들의 이야기다. 전남의 모 특성화고에 얼마 전 노동인권 수업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1교시. 교실엔 단 두명의 학생이 앉아 있었다. 출석부에 적힌 인원은 26명.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학생들에게 어렵사리 말을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9시20분쯤 되자 뒷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명이 들어왔다. 9시 반쯤 또 한명. 특성화고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모둠을 만들어 나까지 다섯명이 둘러앉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뭘 하려는 의욕을 보이는 학생은 없었다. 내가 활동지를 나누어주고 같이 토론하여 적어보자고 했을 때 볼펜이 없어서 못 한다는 학생들. 내가 뭘 하든 상관없이 학생들은 자기 볼일을 보고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하는 학생도 있었다. 강사에게는 매우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지난 5년간의 특성화고 수업을 통해 나는 배웠다. 존중은 존중받아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 학교의 통제와 경쟁의 논리가 내면화된 정도에 따라 학생들의 무례와 수업 분위기는 학교마다 다르지만, 무기력과 좌절감이 둥둥 떠다니는 교실에서 존중받아본 경험 따위는 거의 없는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점은 전남의 어느 특성화고엘 가도 마찬가지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질문을 하면 매번 한명쯤은 장난을 걸어왔다. 가령 이런 식, 성서에 나오는 인물과 이름이 같은 학생에게 “이름이 독특하네요. 기독교 집안인가요?”라고 내가 물었을 때 다른 학생들이 키득거리며 “쟤네 집 교회 무지 열심히 다니는데요. 그 교회 이단이에요.” 나 역시 학생들의 어떤 말도 무시하거나 흘려버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어느 순간쯤 학생들은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단’이라는 단어를 잡아챘다. “아, 이단. 기독교계의 ‘아싸’란 얘기군요. 그럼 우리, 기독교 말고 그냥 ‘아싸’들의 노동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제가 보기엔 여러분도 이 사회에선 ‘아싸’ 같은데 저도 그렇거든요. 근데 저는 이 사회에서 내가 ‘아싸’라는 데 약간은 자부심이 있어요.” 그즈음부터 학생들은 고개를 들었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 같다. 하나같이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어코 땅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 대규모화와 관행농이라 불리는 화학농들 사이에서 고집스레 유기 농사를 짓는 사람들, 대도시의 현란함과 편리를 버리고 시골에 와서 소박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 직장에서 해고되어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바쁜데 ‘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라며 싸움을 선택한 사람들, 어떻게든 내 새끼만은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새끼만 잘사는 세상은 소용없다며 마을 학교를 만들고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가르쳐보겠다는 사람들 등등. 다시 말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선택한,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들의 이야기 말이다. 이쯤에서 학생들의 눈빛은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그날의 수업을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 이야기로 마쳤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남을 짓밟고 기둥을 오르던 애벌레가 어느날 경쟁을 포기하고 내려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자기에게서 실을 뽑아 고치를 짓고 결국 나비가 되는 이야기. 수업이 끝날 무렵 한 학생이 물었다. “쌤, 쌤 같은 생각을 하는 어른이 많나요?” 나는 대답했다. “비율로 따진다면 아주 소수겠지만, 아마도 학생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많을 거예요.” 학생들의 표정도 확연히 밝아졌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모처럼 떠오른 이 진지한 눈빛과 밝은 표정을 제도교육이 끝내 지켜줄 수 있을까 가슴이 저렸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를 읽고 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왜 결국 나비가 되는 ‘애벌레’가 아니라 ‘꽃들’에게 희망을, 일까? 전남에서 특성화고 학생들을 만나면서 나는 어쩌면 그 대답을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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