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제작실장 ‘공기’같이 보이지 않는데 정말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과 같이 굽이진 골짜기를 흘러내리면서 촉촉하게 적시는 사람들이 있다. 그나마 나라 꼴을 갖추고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이들 때문이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홀몸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방문보건간호사가 없었다면 소외된 사람들의 의료 질은 확 떨어졌을 것이다. 매일 전화하고 찾아다니는 독거노인생활관리사가 없었다면 이들은 더 고립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복지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발굴하고 지역사회와 연계시켜주는 통합사례관리사와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어린이들을 찾아내어 디딤돌을 놓아주는 드림스타트 노동자들은 어떤가? 물리적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하루 150여곳을 방문하는 수도검침원 노동자들은? 매일 고속도로 나들목을 다니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수고로운 노동에 대해 한번이라도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서비스가 조금이라도 성에 안 차면 화를 낼지언정 이들의 고용 형태나 삶에 대해 무감하지 않았던가? 학교급식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해 한번이라도 깊이있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이들의 노동이 멈추면 국가는 마비되고 사회는 위험에 처한다. 당연히, 마땅히, 응당, 해야 할 노동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노동 환경에 대해서는 질끈 눈을 감지 않았나 반성할 일이다. 그나마 지역에서는 이들을 일상으로 만난다. 거리에서, 일상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만난다는 것은 기실 축복이다. 내 삶이 어떻게 지탱이 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구가 적고 관계가 촘촘한 지역이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낀다. 한 사람이 고통받으면 죽 연결되어 그 이야기가 어느 순간 전해진다. 지역 언론의 공론화 작업을 통해 하나둘씩 열악한 환경이 개선되는 것을 보면 작은 보람을 느낀다. 2006년 새해 벽두부터 해직된 청소 노동자들은 1년의 지난한 투쟁 끝에 전원 복직됐다. 그렇게 복직된 청소 노동자들은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하는 마중물이 되었다. 다양한 비정규직을 끌어안는 공공연대노조를 만들어 그들의 싸움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2014년 말 해고 통보를 받은 방문보건 노동자들이 3개월 남짓 거리 투쟁을 한 뒤 2017년부터 무기계약직 전환을 약속받은 것도 함께 투쟁하고 연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합사례관리사, 드림스타트, 청소년지도사 등 5개 직종 12명이 2018년 3월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도 지역사회의 꾸준한 관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옥천신문>에서 9월5일치로 수도검침원들이 옥천군의 사실상 위장도급 형태로 운영하며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수도검침원들이 노조에 가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년 넘게 그림자 노동을 해오면서 투명인간으로 살아온 그들의 노동이 지금이라도 드러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지금까지 왜 들여다보지 못했는가 하는 반성이 동시에 든다. ‘직접고용’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까지 받았지만, 한국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은 “자회사가 전담하게 한 방침은 그대로 확고부동하게 유지하겠다”고 해, 현장수납 노동자들이 명절 연휴에도 투쟁을 하게 했다. ? 함께 연대해 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역에서부터 우리의 노동자들을 지켜내야 한다. 그들은 바로 같이 삶을 부대끼며 사는 우리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렵게 제보를 하고 힘겹게 투쟁을 결심한다. 말단의 노동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피로한 관계 노동에서 그들이 하는 몫과 노동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들이 버텨냈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가 유지된 것이다. 물론 억울한 사실을 알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체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당장 거리에 나와서 투쟁을 할 수 있는 삶의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그래서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약한 자들은 ‘약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당사자를 비판하기보다 우리의 연대가 아직도 미흡하다는 것을, 체계의 구조가 너무나 악랄하다는 것을 우리는 성찰하고 비판해야 한다.
칼럼 |
[지역에서] ‘공기’ 같은 사람들과의 연대 / 황민호 |
<옥천신문> 제작실장 ‘공기’같이 보이지 않는데 정말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과 같이 굽이진 골짜기를 흘러내리면서 촉촉하게 적시는 사람들이 있다. 그나마 나라 꼴을 갖추고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이들 때문이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홀몸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방문보건간호사가 없었다면 소외된 사람들의 의료 질은 확 떨어졌을 것이다. 매일 전화하고 찾아다니는 독거노인생활관리사가 없었다면 이들은 더 고립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복지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발굴하고 지역사회와 연계시켜주는 통합사례관리사와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어린이들을 찾아내어 디딤돌을 놓아주는 드림스타트 노동자들은 어떤가? 물리적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하루 150여곳을 방문하는 수도검침원 노동자들은? 매일 고속도로 나들목을 다니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수고로운 노동에 대해 한번이라도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서비스가 조금이라도 성에 안 차면 화를 낼지언정 이들의 고용 형태나 삶에 대해 무감하지 않았던가? 학교급식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해 한번이라도 깊이있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이들의 노동이 멈추면 국가는 마비되고 사회는 위험에 처한다. 당연히, 마땅히, 응당, 해야 할 노동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노동 환경에 대해서는 질끈 눈을 감지 않았나 반성할 일이다. 그나마 지역에서는 이들을 일상으로 만난다. 거리에서, 일상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만난다는 것은 기실 축복이다. 내 삶이 어떻게 지탱이 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구가 적고 관계가 촘촘한 지역이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낀다. 한 사람이 고통받으면 죽 연결되어 그 이야기가 어느 순간 전해진다. 지역 언론의 공론화 작업을 통해 하나둘씩 열악한 환경이 개선되는 것을 보면 작은 보람을 느낀다. 2006년 새해 벽두부터 해직된 청소 노동자들은 1년의 지난한 투쟁 끝에 전원 복직됐다. 그렇게 복직된 청소 노동자들은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하는 마중물이 되었다. 다양한 비정규직을 끌어안는 공공연대노조를 만들어 그들의 싸움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2014년 말 해고 통보를 받은 방문보건 노동자들이 3개월 남짓 거리 투쟁을 한 뒤 2017년부터 무기계약직 전환을 약속받은 것도 함께 투쟁하고 연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합사례관리사, 드림스타트, 청소년지도사 등 5개 직종 12명이 2018년 3월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도 지역사회의 꾸준한 관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옥천신문>에서 9월5일치로 수도검침원들이 옥천군의 사실상 위장도급 형태로 운영하며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수도검침원들이 노조에 가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년 넘게 그림자 노동을 해오면서 투명인간으로 살아온 그들의 노동이 지금이라도 드러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지금까지 왜 들여다보지 못했는가 하는 반성이 동시에 든다. ‘직접고용’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까지 받았지만, 한국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은 “자회사가 전담하게 한 방침은 그대로 확고부동하게 유지하겠다”고 해, 현장수납 노동자들이 명절 연휴에도 투쟁을 하게 했다. ? 함께 연대해 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역에서부터 우리의 노동자들을 지켜내야 한다. 그들은 바로 같이 삶을 부대끼며 사는 우리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렵게 제보를 하고 힘겹게 투쟁을 결심한다. 말단의 노동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피로한 관계 노동에서 그들이 하는 몫과 노동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들이 버텨냈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가 유지된 것이다. 물론 억울한 사실을 알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체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당장 거리에 나와서 투쟁을 할 수 있는 삶의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그래서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약한 자들은 ‘약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당사자를 비판하기보다 우리의 연대가 아직도 미흡하다는 것을, 체계의 구조가 너무나 악랄하다는 것을 우리는 성찰하고 비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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