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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8 17:19 수정 : 2019.10.29 15:08

박주희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쌀값을 물어보면 실제보다 높은 가격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매일 밥을 먹으면서도 쌀값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기름값에는 예민한데 쌀값엔 왜 관심을 두지 않을까. 너무 싸기 때문이다. 값이 싸니까 조금 오르거나 내리더라도 체감하지 못한다. 올라도 부담이 되지 않고, 내려도 별 감흥이 없다.

마트에서 10㎏짜리 쌀을 사면서 새삼 가격표를 다시 봤던 기억이 있다. 온 식구가 한달 넘게 먹을 양인데 쌀값이 3만원 남짓이다. 하루에 1천원꼴. 밥 한 공기에 300원도 안 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왜 농민대회 때 ‘밥 한 공기 300원!’이라는 구호가 등장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현재 250원이 채 안 되는 쌀값을 300원까지는 올려달라는 요구다. 후식으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3천원이 넘는데 밥은 한 공기에 300원이 목표 가격이다. 그럼에도 벼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 쌀을 지켜주는 농민들 덕분에 우리는 매일 밥심으로 살고 있다.

지난주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안 농업분야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개도국 지위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하라’며 그 시한까지 못박아 미국 무역대표부에 지시할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관련 보도를 보면, 미국의 통상 압박과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대비한 선택이라고 이해된다. 게다가 농업 분야의 경우 도하개발어젠다 협상이 회원국들 사이 견해차로 10년 넘게 중단된 상태로 가까운 장래에는 타결 가능성도 크지 않다. 새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당분간은 현재 적용되는 농산물 관세나 보조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당장은 불이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농민들은 농업 기반이 흔들릴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개도국 지위 포기가 농업 포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한국이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는 맞지만, 한국의 가구당 농업소득 수준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 당시 1천만원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서 ‘당장 불이익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농민을 설득시키고 시민을 안심시킬 수 없다. ‘당장은 괜찮다’를 바꾸어 말하면,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말이다. 우리 농업의 불안한 미래를 예정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언제가 되든지 새 협상이 시작돼 현재 513%인 쌀 관세율이 대폭 낮아졌을 때 어떻게 우리 쌀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답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쌀뿐만 아니라 고추, 양파, 마늘, 인삼, 감자 등도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품목으로 거론된다.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와 같은 새로운 보조금 제도를 약속하지만, 제도적 장치만으로 우리 농업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가지만 우리 농업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하다. 그래서 농업은 쉽게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희생당해왔다. 현재 식량 자급률은 24% 수준이다. 개도국 지위 졸업은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며 몇년은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식량 주권을 지켜내려면 이제라도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체질을 바꿔나가야 한다. 정책이나 제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번 결정이 농업은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일깨우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지난 일요일 아침 차 안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 일대기를 담은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다. 우루과이라운드로 수입쌀 개방 문제를 놓고 정부와 성난 농민들 사이에서 중재를 하던 추기경의 모습이 그려졌다. 당시 추기경은 쌀 개방으로 실의에 빠진 농민들을 위로하려 애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위기를 도시와 농촌을 한데 엮는 공동체를 만드는 계기로 삼았다. 그때 꾸린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는 지금도 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도시와 농촌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1994년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창립 선언문을 곱씹어본다. “농업, 농촌, 농민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이로부터 새로운 삶의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도시와 농촌의 생명, 생활공동체 운동만이 ‘함께 살고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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