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3 18:23
수정 : 2019.12.24 02:36
이나연 ㅣ 제주 출판사 ‘켈파트프레스’ 대표·미술평론가
제주는 큰 섬이다. 지하철이나 트램 같은 시원한 대중교통이 없던 탓에 예부터 동쪽과 서쪽, 제주시와 서귀포로 생활권이 나뉘어 잦은 왕래는 어려웠다. 자동차로 왕래가 편해졌어도 제주시 기점 동쪽 끝이나 서쪽 끝은 여전히 큰마음 먹고 이동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서쪽이나 동쪽을 갈 때면 관광객의 시점으로 제주를 탐험하는 느낌이다. 이 탐험심을 좀더 끌어올려 기발한 패키지여행에 참여해봤다. 이름하여 2박3일 ‘제주 동쪽마을 원정대’.
서쪽인 애월읍 고내리에서 ‘디어마이블루’라는 꽃집 겸 서점을 운영하는 주인장이 동쪽의 독립서점들과 자연 명소에 인근 맛집까지 두루두루 소개하고자 짠 프로그램이다. 마침 일정에 내가 가본 곳이 거의 없길래, 공지가 뜨자마자 1번으로 신청을 해뒀다. 20여명의 원정대에 제주도민이라곤 내가 유일했다. 하지만 호기심의 정도가 외부에서 오신 분들보다 덜했는가 하면 절대 아니었다. 그림책을 전문으로 파는 ‘사슴책방’에서는 희귀한 책에 값을 치르느라 큰 지출을 하고도 후회라곤 없었다. 문경수 탐험대장의 설명으로 다시 본 만장굴은 그 형성 과정부터 발견 과정까지 경이로웠다. 초등학생들이 직접 탐험대를 꾸려 발견한 이 길고 긴 용암굴은 문경수 대장이 늘 설파하는 문장, “제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귀한 섬이다”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후로 찾아간 ‘풀무질’은 서울 성균관대 앞에서 오랫동안 자리했던 인문학 서점의 주인장이 제주로 이주하며 새로 꾸린 책방이다. 신생 책방이라지만 동명의 서점을 오랫동안 꾸려온 주인이 서점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쓴 책을 직접 낭독해주셨다. 공간과 공간을 꾸리는 이들과 소통하면서 이어진 여행은, 이 패키지가 단순 관광이 아니게 되는 이유였다. 게다가 전국에 500여개에 이른다는 독립책방 중에서 100여개가 제주에 있단다. 도시를 떠나 제주로 이주를 결심한 이들이 마련한 자구책은 카페, 게스트하우스, 혹은 서점이었다. 농번기엔 귤도 따고 부지런히 부업을 해야 생계를 잇는 수준이라지만, 어쨌든 제주는 바야흐로 책방의 섬이 됐다.
이튿날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동쪽 원정의 이유인 성산일출봉에 올라 일출을 봤다. 맞다. 2019년을 보내고 2020년을 맞이하며 동쪽에서 일출을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자는 게 이 원정대의 출범 이유이기도 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을 산뜻하게 보고 나서는 최근에 전시가 바뀐 ‘빛의 벙커’에 들렀다. 그 후에 찾은 작은 책방 두 곳은 ‘여행가게’와 ‘키라네책부엌’이다. 세계여행을 다니며 모은 차를 대접하고 여행책을 파는 여행가게 옆에는 전세계의 연필을 파는 ‘연필가게’가 세트로 있다. 키라네책부엌은 음식과 관련한 식재료와 주방도구, 그리고 당연히 책을 판다. 들르는 장소마다 뭔가에 홀린 듯 순순히 지갑을 여는 것은 패키지여행의 옵션인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출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지역 경제에 여행 비용이 돌아가는 공정여행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뭐 먹고 사는지 설명을 들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책방의 수익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이튿날 숙소인 ‘유채꽃프라자’는 서귀포 가시리 주민들이 손수 꾸리는 공간이다. 호텔만큼 쾌적한 공간을 제공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근의 비밀 산책 코스를 직접 안내해주는 최고급 서비스가 포함돼 있다. 그날 밤 유채꽃프라자의 옥상에서 별자리 강의를 들었다. 여행 내내 날씨가 어찌나 좋았는지, 별도 달도 너무나 선명해서 보기 힘들다는 노인성까지 봤다. 커다란 달과 밝은 별 이야기를 들으며 스무 명의 군집이 동시에 하늘을 보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백남준의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티브이(TV)’를 떠올렸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달은 지구의 유일한 위성이었다. 달을 보면서 토끼가 절구질하는 모양까지 상상해냈던 옛사람들에게 달은 지금의 티브이와 같았다.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12개의 달을 12개의 텔레비전으로 형상화한 백남준의 상상력은 지금도 유효했다. 달 다음으로 오래된 미디어인 책은, 그 책을 유통하는 책방은,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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