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역피라미드 시대 ②아이 낳고 싶어도 못낳는 사회
“혹시라도 아이가 생길까봐….” 결혼 4년 차에 접어든 직장인 신지훈(33·가명)씨는 지난 2월 병원에서 ‘정관수술’을 받았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출산 포기를 결정한 이후, 보다 확실한 피임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훈씨는 “나도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 아이에게 더 안 좋은 상황만 물려줄 것 같았다”며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선 보다 확실하게 임신 가능성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내에게 응급피임약(사후피임약) 처방을 받게 했던 일을 그는 ‘미안한 기억’으로 떠올렸다. 요즘 그의 주변에선 정관수술 이야기가 화제로 자주 오른다고 했다. 그는 “또래 친구들끼리 모이면, 과연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토론이 자주 벌어진다”고 말했다. 과거 우리나라 인구정책에서 ‘정관수술’은 출산억제 정책의 상징이었다. 1960년대 ‘가족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정관수술비를 지원해온 정부는 1970년대에는 수술을 받은 이들에게 아파트 분양 우선권까지 줬다. 이런 사정은 저출산이 심화되면서 180도 달라졌다. 2004년 말 정부는 정관수술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혜택도 없앴다. 이런 정부 정책 방향과는 정반대로, 스스로 출산을 포기하고 정관수술을 선택한 30대 청년 지훈씨의 이야기는 ‘아이를 낳고 싶어도 못 낳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한국 사회의 ‘인구 역피라미드’ 시대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요인 중 하나가 청년층의 만혼과 출산연기 및 포기다. 결혼과 출산을 미룰수록 초산 연령이 높아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가임기간이 단축되는 탓이다. 통계청 인구동향조사를 보면, 1993년 26.2살이던 초산 연령은 지난해엔 31.2살로 높아졌다. 이 기간에 합계출산율은 1.65명에서 1.24명으로 뚝 떨어졌다. 이들 세대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결혼->집 장만->출산->자녀교육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 이행 단계마다 드는 비용은 날로 커지지만, ‘삼포 세대’(취업·결혼·출산 포기)로 불리는 20~30대 청년층은 고용 및 소득, 주거 등 모든 면에서 경제적 기반이 더 취약해지고 있는 탓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저출산 대책이 청년세대의 고용 및 주거 안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희망과 현실의 간극 원래 지훈씨도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에 마음을 바꿨다. 서울에 살던 그는 점점 경기도 외곽으로 집을 옮겨 다녀야 했다. 2년마다 오르는 전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무리를 해서 전세자금 대출을 받은 뒤로는 매달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 150만원씩 들어간다. 부부 합산 소득이 월 450만원가량인데 부모님 용돈을 드리고 생활비를 쓰다 보면 저축할 돈이 남지 않는다. 지훈씨는 “임신을 하면 그때부터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아져 감당이 어려울 것 같았다. 부모가 됐는데 아이가 원하는 것을 (돈이 없어서) 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라리 낳지 말자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지훈씨처럼 출산을 포기하고 ‘무자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피임을 하는 경우는 통계에서도 볼 수 있다. 보건사회연구원의 ‘2015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피임 중인 가임기 기혼여성 8219명 중 무자녀 여성 가운데 ‘단산’을 목적으로 피임하는 비중이 30.1%에 달했다. 또 자녀를 하나 둔 여성 가운데 추가 출산을 하지 않으려고 피임하는 경우는 80.5%나 된다. 출산을 미루기 위해 피임을 하는 목적에는 ‘소득 부족’ 등 경제적 이유가 큰 비중으로 포함됐다. 보사연의 같은 조사에선 여성들이 원래 이상적으로 낳고 싶어했던 자녀의 수와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는 점도 보여진다. 기혼여성(15~49살, 1만1009명)의 ‘이상 자녀 수’는 평균 2.25명이었다. 하지만 ‘기대 자녀 수’(현재 출생아 수+향후 출산 계획)는 1.94명, 실제 ‘출생 자녀 수’는 1.75명뿐이었다. 특히 이런 ‘희망’과 ‘현실’의 간극은 기혼여성의 연령이 낮을수록 더 크게 벌어졌다. 청년층이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 있는 이기적인 세대여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불안이 이들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기쁨을 빼앗고 있다는 표현이 지금 현실에서는 더 적절해 보인다. 심해지는 출산 양극화고용·소득·주거 불안 탓
결혼·출산 미루는 20~30대
‘희망자녀 수’와 현실 간극 커
“가족 구성하는 것 자체가 계층화
소득 불평등 완화가 저출산 대책” ■ 소득수준이 출산율 가른다 건강보험공단이 최근 10년 새 분만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6년에는 소득수준이 중간층인 보험료 3분위 산모 비중이 26.2%로 가장 컸지만 지난해엔 소득수준이 높은 편인 보험료 4분위가 33.8%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인 보험료 1, 2분위는 10년 새 분만 산모 비중이 줄어든 데 견줘 4, 5분위(고소득층)는 늘었다. 소득과 자산 수준에 따른 출산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셈이다. 가구소득이 월 1500만원인 40대 직장인 정종철(가명)씨 부부는 몇해 전 ‘가정출산’으로 셋째 아이를 낳았다. 그는 “통증 조절 등 인위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병원보다 최적의 환경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가정출산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가정출산은 아직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에 최소 100만~200만원가량의 비용을 내야 한다. 정씨 부부가 아이 셋을 키우는 데 쓰는 비용은 사교육비를 합쳐 월 800만원가량이다. 최근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전파되고 있는 ‘가정출산’이나 2주간 비용이 2천만원에 달하는 서울 강남의 산후조리원은 경제적 부담으로 출산을 미루는 저소득층의 모습과 대비되는 풍경이다. 무엇보다 집값 상승으로 인한 주거비 부담은 출산을 주저하게 만드는 첫 관문이 되고 있다. 안정적인 주거공간이 확보될 때까지 출산을 미루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결혼 12년 차 직장여성 한혜정(가명·41)씨는 “결혼할 때는 8300만원짜리 전셋집을 얻어 살았는데, 지금은 보증금 7000만원에 월세 25만원인 집에서 산다”고 말했다. “어릴 때는 내가 한 번도 엄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몇해 전 출산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한창근 성균관대 교수(사회복지학)가 최근 한국노동패널 자료를 활용해 2000년 이후 초혼으로 가구를 형성한 1062쌍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집을 사서 결혼했거나 집값이 높을수록 첫 자녀를 빨리 낳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교수는 “결혼을 할 때 가장 큰 비용부담으로 작용하는 신혼부부 주거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청년층의 주거가 안정돼야 혼인 및 자녀출산이 활발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