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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연세대 사건’과 학생운동 회고하는 전시회 연 김영희 연세대 교수
1996년 8월 20일 서울 연세대학교. 한국대학총학생연합(한총련)이 주축이 된 대학생들이 8월 14일부터 시작한 제7차 범민족대회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범민족대회를 불허한 경찰은 연세대 주변을 원천봉쇄했다. 학생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회가 끝난 8월15일 오후 경찰은 봉쇄를 풀지 않고 학생들의 귀가 길을 막았다. 대규모 병력을 학교 안으로 투입해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였다. 학교 안에 몰린 학생들은 건물을 점거하고 뜻하지 않은 농성에 들어갔다. 4박5일간의 농성은 20일 새벽, 경찰이 헬기를 동원한 진압작전으로 끝이 났다. 과학관, 종합관 등 건물 곳곳에 불이 붙었고, 성한 유리창이 없을 정도로 학교는 폐허가 되었다. 학생 5,848명이 연행되었고, 462명 구속, 3,341명 불구속, 373명이 즉심에 회부되었다.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연행자와 구속자를 기록했다. 진압 작전에 투입된 경찰도 피해가 컸다. 900여명이 다쳤고, 당시 20살이던 김종희 이경이 돌에 맞아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졌다.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80~90년대를 풍미했던 학생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모두의 침묵 속에 ‘96년 연세대’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 사회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잠시 미뤄 두자. 96년 8월 그 자리에 있었던 그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왜 그날의 사건을 말하지 못하는가?
말하지 못하는 기억, 봉인되거나 억압된 기억... 1996년 연세대에서 20년 만에 편지가 왔다. 우리는 왜 아픈 역사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기획/ 이재만 기자, 영상/ 조소영 피디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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