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인의 책탐책틈
연륜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간의 부정(不正)과 부당(不當)에 관대해져 가는 시간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아서이다. 부정과 부당을 당하는 쪽은 연륜 때문에 초라해지고, 누리는 쪽은 연륜 때문에 뻔뻔해진다. 더 어려서는 그렇게 관대해져 가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가는 지금은 초라하거나 뻔뻔하게 늙어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연륜이란 말에 애써 냉담했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와 성석제의 <투명인간>을 읽고 나서 다른 연륜을 생각했다. 어이없을 만큼 성실하고 착한 ‘보통’ 인간들에 대한 애정과 이들이 겪어내는 굴곡을 옮겨내는 입담은 여전하다. 그러나 어쩐지 이전의 소설들보다 훨씬 처연하다. 아마도 70~80년대의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엮이면서 과거사의 폭력들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그래서 거기에서 사라지고 파괴되는 인물들이 뿜어내는 비애의 아우라가 한층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애는 여전히 ‘당하는 자’의 감수성이고, 세상의 폭력은 변함없이 어이없으나 변함없이 건재하다. 그래서 나는 두 인물이 실종되는 이야기의 말미에서 이 소설들이 다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기부의 폭행에 초죽음이 된 나복만(<차남들의 세계사>)과 안정된 일상을 위해 죽도록 노력했지만 수억대의 피해보상액을 빚져야 하는 신세가 된 김만수(<투명인간>)는 그 수난의 끝에서 스스로 사라진다. 역사의 폭력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이들이 산전수전 다 겪어 만신창이가 된 끝에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초라한 연륜을 안고 그것을 초연과 관대의 미덕으로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 폭력과 수난의 세계사는 여전히 뻔뻔하게 지속,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수난의 끝에서 스스로 세계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 결말은 유쾌하지도 않지만 비극적이지도 않다. ‘당하는 자’로부터 ‘거부하는 자’로의 전환 때문이다. 안기부의 필요에 따라 나복만은 고정간첩이 되었고, 회사의 필요에 따라 김만수는 빚쟁이가 되었다. 문맹의 택시운전사에게, 짠돌이 세차의 달인에게 가당찮은 일이라는 것은 상관없다. 그들은 권력과 자본의 필요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러니 조작당하지 않는 자기로 살기 위해서 이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폭력이거나 치욕이거나에 상관없이 유장하고, 인간은 안간힘을 써도 자기가 아닌 자기로 살 수밖에 없으므로, 그 고리를 끊기 위해 ‘거부하는 인간’이 탄생했다. 통쾌하달 수는 없지만, 어쨌든 뻔한 세상에 구멍이 하나쯤 뚫린 기분이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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