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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05 20:16 수정 : 2016.10.21 08:54

서영인의 책탐책틈

뒤늦게 팽목항에 갔다 온 탓인지 자꾸 쓸쓸한 이야기에 손이 간다. 그러니까 이 쓸쓸함이란 감염된 것이다. 맥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낯선 도서관에서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나 아이를 잃은 젊은 부모의 이야기 같은 것을 읽었다. 겨울호 계간지에 실린 소설들이다. 그러다가 문학의 감염력에 대해 생각했다.

필시 그들도 감염되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슬픔에. 그렇지 않다면 김연수가 오래전 헤어진 연인들의 시간에 2014년 4월16일이라는 날짜를 새겨 넣지 않았을 테고(<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김애란이 52개월 된 아이의 죽음과 젊은 부부의 복잡한 슬픔을 그렇게 착잡하게 그려내지는 않았을 것이다(<입동>). 최은영이 교황 집전 미사의 인파 속에 있는 한 가난한 엄마를 유가족 텐트 옆에 우연인 것처럼 세워 놓은 것도 그 때문일 터.(<미카엘라>) 그 감염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소설을 읽으면서 진땀이 다 났다. 나의 슬픔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너의 슬픔이라고도 말할 수 없으니, 교감이라고도 이해라고도 못하고 겨우 감염이라 말한다.

‘세월호 사건’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그 사건, 그러니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이라고, 김연수는 부러 길게 에둘러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나 시점에 무관하게 소설은 3인칭도 1인칭도 될 수 없었다. 사건을 직접 다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관찰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할 수는 더더욱 없다. 헤어진 연인들의 사연에 스쳐 놓거나, 아이를 잃고도 대출금 걱정을 해야 하는 젊은 부부의 참담함으로, 너의 이야기인 듯, 나의 이야기인 듯 겹쳐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 밤바다를 혼자 건너던 날의 멀미나(<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들고 있는 느낌”(<입동>)으로 당사자의 마음을 애써 짐작할 뿐이다. 위로도 애도도 할 수 없지만 차마 떠날 수는 없어서 멀찍이 눈물을 삼키고 있는 안타까움의 자국이 그래서 더 또렷하다. 먼 이야기로 어떻게든 가까운 마음을 밟아 보려는 자국. 그렇게 사건으로 딸을 잃은 엄마와, 대견하게 자란 딸이 있어 가난도 감사한 또 다른 엄마가 한 이야기로 겨우 모였다.(<미카엘라>)

서영인 문학평론가
3인칭도 1인칭도 아니라 생각했으나 다시 들추어 보니 소설은 모두 1인칭으로 쓰여 있었다.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시멘트 벽면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20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도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입동>) 아이의 죽음이 너와 내가 선 삶의 밑자리로 번져 온다. 문학의 감염력이란 사건의 가장 깊은 자리를 꾹꾹 눌러 펼쳐서, 옆 사람의 또 옆 사람의 발밑에 가져다 놓는 것과도 같은 것이 아닐지. 그 안간힘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나의 이야기가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니.(<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믿을 수 없는데도 또 속절없이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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