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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07 20:30 수정 : 2016.10.21 08:49

서영인의 책탐책틈

세상에 없는 나의 집
금희 지음/창비 펴냄(2015)

“외할머니는 지나치게 아들의 식미를 고려하다 못해 외손녀인 나를 위해 한두 가지의 반찬쯤은 고춧가루를 덜 뿌려야 한다는 궁리마저 감감 잊어버리고 말았다.” 조선족 작가 금희의 소설 ‘봉인된 노래’의 한 구절이다. 낯선데 익숙하고 익숙한데 낯설다. 작년 계간지에 발표된 것을 읽을 때도 그렇더니 소설집으로 나온 것을 새로 읽는데도 그렇다. 다 아는 말인데도 가끔씩 말들이 입속에서 걸려서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했다. 그 말들이 가끔 어색하고, 가끔 사랑스러웠으며, 그리고 자주 새로웠다. 한참 멀리, 공들여 에둘러 와야 했다. 그 말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봉인된 노래’에 잠깐 등장한 중국가수 ‘등려군(鄧麗君)’ 때문이었는지, 책을 읽다가 오래전 영화 <첨밀밀>을 떠올렸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홍콩으로 입성하는 소군(여명)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소군과 이요(장만옥)의 사랑과 이별, 재회의 스토리를 거쳐 영화는 처음의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첫장면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끝장면에서는 보인다. 소군과 이요는 같은 열차에서 등을 마주대고 있었던 것.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같은 열차에 있었으니 누군가는 운명적 사랑을 믿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낭만적 운명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우연이었다. 중국대륙에서 홍콩으로, 그리고 뉴욕으로 그들을 떠밀고 갔던 자본의 물결 위에서, 우리는 모두 살기 위해 버둥대며 같은 운명을 안고 사는 소군이거나 혹은 이요, 혹은 내 옆 사람. 그 우연성의 리얼리티를 읽기 위해서는 한 뼘만큼의 시야가 더 필요하다.

조선족 이주노동자 박철의 사랑(‘노마드’)도 그랬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의 형편 때문에, 그리고 나중에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불안 때문에 철은 수미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얼마간의 돈을 벌어 중국으로 돌아온 철은 장춘에서 수미의 이름을 듣는다. 죽마고우 호영과 살다가 한국으로 떠나 버린 탈북자 선화의 이름에는 철이 한국에서 만난 선아의 이름이 겹쳐진다. 그 수미와 선화, 혹은 선아가 같은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중요하지 않다. 더 많은 기회와 부를 얻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온 한국인들이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한국으로 간 조선족 이주노동자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또 한국으로 이동하는 탈북자들은 모두 같은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수미를 만날 때 보이지 않던 공통성이, 중국에서 수미의 이름을 들을 때는 보인다. 그렇게 한 뼘의 시야가 더 열린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그 한 뼘의 시야 안에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이 어떻다는 거이는 하느님만 아시디, 딴 사람들으는 다 모른다는 거이요.”(‘옥화’) 가릴 것 없는 주제에 교회 신도들의 동정에 감사하지 않는 탈북자 여인은 항변한다. 당신이 나를 아냐고. 속속들이 알 수 없어 미안하지만 외로운 자본과 노동의 지반 위에 우리는 함께 서 있다고 말해 본다. 오해된 타자를 읽는 일은 익숙한 나를 다시 읽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감감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인지. 가까이 있어야 보이는 장벽과 멀리 있어야 보이는 공통성의 사이가, 촘촘하게 반짝인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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