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인의 책탐책틈
너무 한낮의 연애김금희 지음(문학동네, 2016) 어느 문학상의 심사회의 자리에서였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꺼냈다. “한국의 고양이는 작가들이 다 키우나 봐요.” 아닌 게 아니라 응모작 중에 고양이 이야기가 많았다. 주인공들의 일상 사이로 고양이들이 출몰했다, 머무르고, 사라졌다. 사람이고 싶지 않거나, 사람 사이에 있는 일이 힘겨울 때, 고양이들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고양이가 한국 문학에 꽤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부엌가구 회사에서 30년을 일한 과장은 생산직 전환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직능계발교육을 받는다(‘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말이 교육이지 정리해고의 수순일 터였다. 직능을 계발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그들 중 대부분은 해고될 것이 뻔했다. 단체행동을 하자는 동료들의 권유를 그는 듣지 않는다. 가구제작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뚝딱뚝딱 가구를 만드는 연습을 혼자 할 뿐이었다. 43명 중 유일하게 자격증을 딴 그에게 사장은 직능계발부를 맡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일은 아마도 직능계발 미흡을 이유로 사원들을 자르는 일이 될 것이다. 낮에는 가구회사 과장으로, 밤에는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주는 ‘고양이 탐정’으로 살았던 그가, 사장의 말을 듣고 난 후 공장의 굴뚝을 오른다. 단체행동을 준비했던 사원들이 걸다 만 플래카드의 글씨가 무엇인지 궁금했다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고양이처럼 고립되어 혼자의 삶을 견뎌온 그가, 그 고립을 연대로 바꾸어 가는 순간이라고 읽을 수 있다. 확실히,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다. 그러나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그는 그냥 싫증이 난 것이 아닐까. 망치질의 직능을 계발하고, 사포질의 직능을 계발하고, 심지어 또 정리해고의 직능도 계발해야 하는 그 회사가. 싫증이 난다면 그냥 그 삶을 나가 다른 삶을 또 살면 된다. 그는 사람 사이로 슥 스며들어와 네 발을 말아 넣고 살던 고양이였다. 싫증이 났고, 그 순간 다른 호기심의 대상을 발견했다. 굴뚝에서 펄럭이는, ‘능’ 자 말고는 다른 글자가 보이지 않는 플래카드. 싫증난 곳은 버리고 호기심이 이끄는 곳을 향해 재빨리 몸을 옮겼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연대란 깨달음이 아니라 몸바꾸기일지 모른다. 명분과 실리를 따지면서 근속연수를 믿는 ‘인간’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아니어도 되는 곳에서 인간답지 않게, 고양이답게 살면 된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