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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8 19:24 수정 : 2016.10.21 08:40

서영인의 책탐책틈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은행나무(2016)

사이코패스에 감정이입이 될 줄은 몰랐다. 작가가 1인칭 시점으로 <종의 기원>을 쓸 때부터 이런 것을 노렸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절대악’의 존재를 그 내면으로부터 끌어냄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잠재된 악의 일면을 보기를 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가 똑바로 보기를 피하는 우리 안의 어두운 본성, 그것을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인 유진의 내면을 통해 밝히는 것. 이른바 ‘종의 기원’의 탐색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자꾸 ‘우리 안에 잠재된 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노출된 악의 환경’이 읽혔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면 나는 ‘절대악’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악’의 환경과 그 발현 방식에 이입한 것이다. 유진의 이모가 내리는 진단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친 것도 이 때문이다. “두려움도 없고, 불안해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고, 남과 공감하지도 못”한다. “남의 감정은 귀신처럼 읽고 이용하는 종족”이며 그를 움직이는 것은 “도덕개념”이 아니라 “이익과 손실의 계산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진만의 것이 아니다.

굳이 사이코패스나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유형의 인간을 자주 본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불리는,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었다는 인사들의 특징이 대개 이렇다. 아니, 대체로 그런 자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한 자들을 모델로 이런 인격을 갖추기를 교육받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능하면 감정 자체를 느끼지 않는 편이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 미래의 성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현재를 닦달하며 손익계산서의 자산을 늘려야 한다. 성과로 드러나지 않는 일에는 게으르지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할 기회는 놓치지 않는다. 강자의 폭력과 무례는 당연하게 여기며 받아들이고, 약자의 피해에는 무신경해도 좋다. 성공하지 못했을 뿐 우리 역시 이런 환경에 노출되어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자들을 내면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 내면화가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한 사람들을 부적응자나 상습적 불평분자로 윽박지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유진이 저지른 최초의 살인은 형과의 서바이벌 게임 중에 일어났다. 게임의 승자는 형 유민이었지만, 유진은 형을 바닷속으로 밀쳐 넣음으로써 최종적 승자가 되었다. 형제는 게임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살아남기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구도 안에서 형은 자기가 뿌린 게임용 총탄에 피투성이가 된 동생의 얼굴을 잊었다. 일면적이든 전면적이든 ‘절대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남기 게임의 구도 안에서 가장 활성화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절대악’을 강조하는 것에 불만이 있다. 계속 적응하는 동안, 우리 안의 악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유전(遺傳)될 뿐이다. 더 이상 이 따위 유전자가 적자(適子)로 생존할 수 없는 세계로 우리가 진화할 때, ‘종의 기원’은 바뀐다. 손톱만큼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나는 거기에 내 생존의 여지를 걸고 싶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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