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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15 19:11 수정 : 2016.12.15 20:00

서영인의 책탐책틈

피프티 피플
정세랑 지음/창비(2016)

실제로 그럴 리 없으니 판타지처럼 읽혔다. 낡은 건물 지하에서 불이 났다. 주말이라 극장에는 계약직밖에 없었지만 침착하게 손님들을 안내했다. 계단을 통해 올라오는 유독가스 때문에 비상구로는 탈출이 불가능했고 손님들은 모두 옥상으로 대피했다. 119 구조 헬기와 닥터 헬기가 대피자들을 조금씩 병원 옥상으로 실어 날랐다. 어린이와 여자들부터 먼저 구조되었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나누며 뒤로 처졌다. 평생 일용직 노동을 해 온 노인은 물탱크에 호스를 연결해 벽으로 물을 흘려 내렸고, 그사이 어른들은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덕분에 소방차의 사다리를 옥상에 걸칠 수 있었고 200명의 대피자들은 전원 구조되었다. 건물은 한층씩 천천히 해체되었고, 중소도시에 흔해 빠진 상가건물이 들어섰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쓰고 보니 너무 멀쩡하고 상식적인 일들뿐이라, 이런 것을 판타지로 읽다니, 판타지가 아니라 아이러니구나 싶었다.

처음부터 이 소설이 판타지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피프티 피플>에 등장하는 50명 혹은 51명,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판타지였다. 스트립걸이나 춘다는 편견 없이 폴댄스를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동료 의사의 천재성을 열등감 없이 사랑하며 그 일의 아름다움을 보조하는 역할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 사고로 남편이 식물인간이 되었지만, 과적차량과 제동거리의 불가피성을 생각하며 화물연대 농성자들에게 샌드위치를 사다 줄 수 있는 사람. 일의 성공과 명예를 모두 얻고 은퇴하였으니 자신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그 운을 나눠주기 위해 어린 아이의 손이라도 한번 더 잡는 사람. 금수저로 태어나 차별 없이 자랐으므로 모든 차별이 너무 잘 보여서 그 차별에 맞설 수 있는 사람. 타투이스트 동생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라 훈계했던 것이 미안해 발바닥에 타투를 새기는 사람. 하나같이 너무 당연하게 인간다운 사람들이 모인 이 작은 세계를 유토피아처럼 느꼈다면, 그건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까.

50명의 인물들이 하나의 이야기씩을 가지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한편의 장편이 되는 구조, 그 인물들이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등장하여 이야기의 얼개를 더 촘촘하게 엮는 전개, 단편이라 하기에도 콩트라고 하기에도 약간은 어색한 분량의 각각의 이야기들. 이런 형식을 두고 특별히 새롭다거나 다르다고 강조할 생각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 최선을 다해 ‘좋은 사람’인 이 50명의 인물들이 한명씩 차곡차곡 누적되면서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들은 사소한 올바름과 당연함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불행과 행운을, 각자의 일과 사랑을, 최선을 다해 숙고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눈앞의 관계들에 예의와 존중을 갖추는 법을 배워 갔을 것이다. 작은 정의나 당연함이 얼마나 지난한 노력이며 고마운 선물인지를 동시에 알아 갔을 것이다. 허황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단단한 자존이 판타지와 아이러니 사이에서 짧은 힌트처럼 반짝였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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