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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09 19:37 수정 : 2017.02.09 19:42

서영인의 책탐책틈

문학 3
창간호/창비(2017)

식민지 시기 <매일신보>에 게재된 문학기사를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후 발간된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관제언론이었고 친일지였다. 감시와 통제 속에서 지속된 문예면은 그것 자체로 한국 근대문학 형성의 불가피하고 모순적인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신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의 개념과 범위가 그리 확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가장 꾸준히 게재되었던 문학기사는 ‘한시(漢詩)’였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시’는 꽤 오랫동안 ‘한시’에 대비되는 ‘신시(新詩)’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30년대는 ‘소설’이라는 장르 앞에 붙을 수 있는 온갖 수식어를 동원한 실험장과도 같았다. 장편과 단편, 중편, 콩트 등의 분량상의 구분 외에도 ‘영화소설’, ‘연작소설’, ‘탐정소설’, ‘유머소설’, ‘괴기소설’ 등등, 낯선 소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당연한 일이다. 문학은 ‘이미’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고 쓰고 교환하는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운동이다.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문학, 익숙하게 받아들인 독법의 범위 내에서 문학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있다는 생각을, 최근 창간된 문예지 <문학 3>을 읽으면서 했다. <문학 3>뿐만 아니라 최근 창간·혁신호를 내고 있는 여러 문예지들이 원고지 40~50매 정도의 짧은 소설들로 소설란을 채우고 있다. 80~100매 분량으로 굳어진 단편소설 읽기의 패턴을 바꿔보자는 의도,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변화된 읽기와 쓰기의 환경을 반영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 의도를 이해하는 것과는 별도로 익숙한 독법을 고수하려는 읽는 몸의 저항감은 보수적이었다. 사건과 인물의 행동과, 심리들이 너무 많이 생략된 것 같아 아쉬웠다. 인물들의 관계, 사건과 사건 사이를 오가며 만들어지는 생각과 마음의 겹이 충분하지 않은데, 결말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기분이었다. 생략을 감수하면서 소설 읽기를 마무리하자니, 이야기가 너무 상식적인 결말로 봉합되는 것 같아 불만스러웠다.

소설 읽기의 허전함을 채워 주는 것은 수록된 소설들을 미리 읽은 독자들의 좌담이다. 짧은 소설이 만들어낸 공백을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은 부지런히 자신의 체험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소설의 공백에 자신의 체험을 채워 넣음으로써, 공감과 이해의 영역은 소설보다 늦게 완성되었고 소설 이후에도 계속 확장되고 있었다. 짧은 소설 읽기에 적응하기 위해 생략과 비약의 허전함을 감수하고 말 것이 아니라 나의 삶과 체험을 더 적극적으로 읽기에 개입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너의 쓰기와 나의 읽기, 혹은 또 다른 너의 이어서 쓰기에 의해 다른 문학이 불쑥불쑥 창출되는 광경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여자아이가 누워 있던 그 자리에 유림은 누웠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2만원을 내고 남은 거스름돈 830원이 만져졌다.”(임솔아, ‘병원’) 링거병을 달고 다니는 어린 여자아이와, 자살시도 후 의료보험을 적용받기 위해 정신과 진단을 받아야 했던 유림과, 거기에 슬쩍 얹힌 윤동주의 시 ‘병원’ 사이에 겹쳐져 있는 수많은 삶을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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