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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8 19:46 수정 : 2018.02.08 20:07

서영인의 책탐책틈

회색 인간
김동식 지음(요다, 2017)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창력으로 정평이 난 가수들의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노래를 듣고 열광했다. “이게 노래지!” “역시 ○○○!” ‘나는 가수다’가 인기를 끌자 유사 프로그램들이 줄이어 기획되었다. <히든 싱어>나 <복면가왕>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시청자들은 여전히 열광했으나 열광의 포인트는 사뭇 달랐다. 얼굴을 가린 가수들의 노래는 하나같이 훌륭했으며, 시청자들은 공개된 가수들의 얼굴을 보며 그 의외성으로 한번 더 즐거웠다. 중요한 것은 가수가 아니라 복면 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김동식의 <회색 인간>은 작가가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의 한 게시판에 올린 이야기들을 묶어 펴낸 책이다. <회색 인간> 말고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까지 총 세권의 소설집이 한꺼번에 출판되었다. 소설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는 기존의 책들과는 전혀 다른 경로의 출판, 전혀 다른 낯선 작가의 등장이다. 복면 뒤의 얼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당연히 궁금했다. 평론가 나부랭이로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무대를 어떻게 봐야 할지 생각도 많았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노래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신의 계시이거나 외계인의 침공 같은, 때로 황당하고 때로 비약적인 설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 세계에 대한 도저한 희망 없음, 어떤 판타지로도 상쇄되지 않는 삶의 피로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인간 수명이 늘어나자 저승 세계에서 사망률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를테면 1+1사망 같은 것. 누군가 한 사람이 죽는다면 그와 무관한 한 사람이 같이 죽는다. 느닷없는 죽음을 막기 위해 인류는 온 힘을 다해 사망률을 낮췄고 마침내 노화방지의 약을 개발했다. 인간은 행복해졌을까. 그들은 늙지 않는 몸으로 저승에 가서까지 영원히 노동해야 했다.(‘사망공동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대기업 본사 빌딩에 어느 날 시커먼 입이 생겼다. 빌딩은 주위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빌딩이 사람을 잡아먹으면 빌딩 안의 사람들은 함께 배가 불렀으나, 빌딩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잡아먹힐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은 빌딩에 갇혔다. 빌딩을 파괴하려 하면 할수록 빌딩의 입은 증식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약자들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빌딩 안의 사람들, 내부자들이 폭탄을 지고 빌딩의 입을 향해 돌진하자 입이 사라졌다. 빌딩 안의 사람들은 그러나 기뻐할 힘도 없었다. 삐쩍 메마른 그들은 지친 얼굴로 살고 싶었다고 말할 뿐이었다.(‘식인 빌딩’) 부와 권력을 독점한 빌딩들에 갇힌 우리는 식인을 일삼는 저 무서운 입을 멈출 수 있을까.

내게는 이 이야기가 하루하루의 삶을 얻기 위해 매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주물공장의 노동자로 10년을 일했고, 단순노동의 시간 동안 이야기를 상상하고 밤에는 소설을 썼다는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여기의 삶에서 다른 것들을 상상하는 능력, 자기의 서사를 갖고 싶은 자들의 고독한 보람. 짧고 기발한 이야기를 문득 스쳐가는 가혹한 비감. 나는 이 작가가 좋아졌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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