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최은영 지음/문학동네(2018) 일찍이 은희경은 “애인이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고 했다. 단 한명의 애인, 유일한 사랑을 관계의 안정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셋, 하니까 권여선의 ‘삼인행’(<안녕, 주정뱅이>)도 떠오른다. 부부인 규와 주란 사이에 친구인 훈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들의 위태로운 여행을 조금은 나른하고 허무한 여유로 바라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단단한 밑변과 날카로운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안정성을 불안하게 유지되는 긴장으로 바라본 윤이형의 시선도 있었다.(‘셋을 위한 왈츠’) 친구든 애인이든 어쨌거나 관련된 사람이 셋은 되어야 하는 거라고, 좀 다른 이유로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당사자, 그리고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이해하는 누군가, 그리고 또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 제삼자. 상처와 고통을 겪은 사람을 위로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그의 마음을 내 것처럼 이해하려고 해도 나는 그가 아니므로 그가 겪은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가끔은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거꾸로 화를 내기도 한다. 네가 어떻게 나를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위로하려고 하지 마. 내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커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보지 못한다. 당사자가 아닌 것이 미안해서, 당사자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때로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르고 머무르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내게 무해한 사람>에는 주로 그런 마음들을 아울러 바라보는 누군가의 자리가 항상 마련되어 있다. 커밍아웃 후 자살을 택한 진희를 생각하며 오래 고통을 겪었던 미주의 이야기가 자기변명이나 연민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그때 너는 나빴어’라고 말하는 주나가 있었기 때문이다(‘고백’). 그런 주나와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미주에게는 또 미주가 지나온 차갑고 단단한 시간을 가만히 짐작하며 아무 것도 묻지 않는 종은이 있었다. 언제나 당사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언제나 제삼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때로 당사자가 되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때로 제삼자가 되어 그 고통의 시간을 짐작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이 된다. 문학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어떤 말의 의미를, 그것이 포함하는 영역을 넓히거나 바꾸는 데 있다. 냉정을 가장한 비겁한 거리 두기 같았던 ‘제삼자’라는 말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래야 하는 때가 왔을 때 더 좋은 제삼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섣불리 이해해서 무례하고 폭력적이 되는 옆 사람의 팔을 붙들어 가만히 제지하는, 그러다가 이해와 위로의 지난함에 지쳐 스스로를 자책하며 울고 있기도 할 옆 사람의 시간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기다려주기도 하는. 그리하여 당사자이기도 하고 제삼자이기도 하면서 깊어지는 관계를 가볍게 흘려 보내지 않으면서 삶을 존중하는 그런 태도를 갖고 싶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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